▲그림책 갤러리

낮보다는 밤이 더 밝았던 거리. 단란 주점과 술집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던 옛날 제주대학병원 앞 골목. 이제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에 언제부턴가 예쁜 간판들이 하나, 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 거리에 밤이 아닌 낮을 밝혀준 작은 가게들 사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던 건, ‘제라진’이라는 특이한 이름이었다. 아담한 크기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곳. 들어서는 순간 한 편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의 제라진. 원래에 이곳이 단란 주점이라고 누군가 말하기 전에는 아마 전혀 눈치채지 못 할 것이다. 

▲단란 주점이었던 제라진 모습

“처음 들어섰을 때는 와... 정말 이런 곳이 있나? 싶었어요.” 그림책 미술관 시민모임 사업 팀장 신수진 씨는 처음 이곳을 들어섰을 때를 떠올렸다. “그래도 길바닥에 컨테이너 박스 설치해서 갤러리를 만드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모두 소매를 걷고 이 단란 주점을 갤러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죠." 작년 봄, 제주시에서 문화예술 활성화 사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이 그림책 미술관 시민모임 회원들에게 들려왔다. 50만 원, 100만 원 십시일반 돈을 모아 스스로의 힘으로 이 단란 주점을 철거하여 홀이었던 곳을 카페로, 룸이었던 곳은 그림책 교육방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단란 주점과 그림책 갤러리의 차이만큼 큰 변화가 이곳 제주시 중앙로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단란 주점을 그림책 갤러리로 만드는 모습

어린 시절 방 안 책장 한 편에 그림책 하나 없었던 사람 없을 것이다. 흥부와 놀부 같은 전래동화를 그림책으로 읽었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그때 그 추억을 가진 어렸던 아이가 커서 책장 한 편 속 공간을 갤러리로 만들었다.

“그림책이라는 것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그림과 글이라는 장르를 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매체 같은 거잖아요. 이러한 그림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게 됐어요. 영화를 좋아하면 영화를 보고 영화평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그림책을 좋아하면 그림책을 보고 그림책 리뷰도 하고 그러다가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겠지요?”

지난 전시회 때 작품들을 보여주겠다며 그녀는 내 앞에 큰 상자 2개를 꺼냈다. 그 안에서 꺼낸 그림책 속에는 제주를 담은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었다. 제주하면 떠오르는 귤, 잊어선 안 되는 4.3사건, 그리고 제주를 만든 설문대 할망 이야기.

“제주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이야기가 많아요. 그리고 그 이야기가 되게 신선해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죠.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그림책 안에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메누리야, 나 곧건 들어보라 책 소개

그중에서도 눈에 띄었던 그림책은 ‘메누리야, 나 곧건 들어보라(며느리야, 내가 말하면 들어보렴)’라는 제목에 책이었다. 이 책을 그리신 이신봉씨는 60세가 넘어서 글을 배우고 84살이 되어 제라진을 통해 작품을 내게 됐다고 한다. 이곳 제라진에는 문구사가 익숙한 8살에 초등학생부터, 문방구를 다녔던 직장인들을 지나 구멍가게에서 군것질을 하던 우리 엄마, 아빠 시대 이야기까지 담겨있었다.

“자기표현을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러나 내가 해도 될까?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지 못해요. 그냥 편하게 내 꿈을 잘 표현해보자는 욕심 없는 마음으로 그림책을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책을 전시하는 것만이 그들의 일은 아니었다. 그녀를 비롯한 그림책 미술관 시민모임 회원들은 제라진을 통해 전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림책을 그리는 것은 활동의 일부에요. 전부는 아니죠. 저희는 그림책에 대해 시민들끼리 모여서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좋은 책을 추천하기도 해요. 그리고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해요.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결국은 저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시민단체니까. 아마 앞으로도 우리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거예요.”

인터뷰 내내 그림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던 그녀는 제라진이 그 누구에게라도 자신을 그리는 한편의 동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바람을 이야기했다.

“제주도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제주도 사람들이 살아왔던 그 시간들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제라진이 됐으면 해요. 우리는 제주도를 그림책 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죠. 제주도에 살고 있는 어머님, 할머님들께 이곳이 살아온 시간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해요. 혹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라도 제라진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아까 말했다시피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일은 대단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 시간을 기록하고 싶다 할 때 이곳을 찾아 하나의 책으로 그 추억을 담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 사람들

<2015 신문제작실습 / 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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