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세계 속으로 나홀로 유럽여행, 봄빛서원, 2017.
걸어서 세계 속으로 나홀로 유럽여행, 봄빛서원, 2017.

“아… 책 뭐로 정하지!?” 아마 이번 학기에 제일 많이 했던 말일 것이다. 바로 가족 독서 릴레이를 위한 책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듣는 ‘출판문화론’이라는 수업은 언론홍보학과에 오랫동안 있던 강의로, 가족 독서 릴레이를 통해서 가족들과 같이 책 한 권을 돌려보고, 소감도 나눌 수 있어 이번 학기에 제일 기대됐던 수업 중 하나였다.

막상 책을 선정하려니 가득했던 설렘은 어디 가고 첫 주자인 내가 책을 잘 선정해야 다음 주자도 별 무리 없이 읽겠다는 생각이 들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주변에서 얼른 책을 골라야 돌려보고, 독후감을 쓸 수 있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교내 중앙도서관을 방문해 책들을 훑어봤다. 눈길을 끄는 책은 있었지만, 손이 가는 책은 없었다.

딱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 나는 내 운과 주변 환경에 짧은 순간들을 맡기곤 했다. 이번에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던 것일까. 며칠 후 “아 이 책이다”라고 확신을 가진 순간이 생겼다. 바로 북 카트에서 배가하려고 꺼낸 책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발견했을 때다. 책과 좀 더 친해져 보자는 생각이 들면서 이번 학기에 출판문화론 강의를 신청했고, 근로 장학도 중앙도서관으로 신청했다. 도서관에서 근로하던 중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다니 어쩌면 이 모든 게 딱 맞아떨어졌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오잇 뚜뚜두 뚜루루루~” 경쾌한 오프닝으로 주말의 아침을 열어주는 KBS의 시사 교양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우리 가족이 꾸준히 즐겨보던 프로그램이다. 여행자의 관점으로 PD 혼자 해외를 누비며 촬영한 영상들은 친근하게 다가왔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학창 시절 내내 즐겨봤으며, 대학 입학한 후 코로나19로 인해 해외는커녕 집 밖을 안 나갈 때도 가족끼리 재방송을 보며 대리 만족을 하곤 했다. 그런 프로그램이 책으로 출간됐었다니, 가족과 나누기에도 내 진심을 담아내기도 좋은 책이라 생각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나홀로 유럽여행 : 서유럽 북유럽 편'을 북 카트에서 발견했을 당시 모습.
                             '걸어서 세계 속으로 나홀로 유럽여행 : 서유럽 북유럽 편'을 북 카트에서 발견했을 당시 모습.

첫 주자인 나는 보통 한 방송을 만드는 데 있어 분담되는 업무들을 혼자서 해나가는 걸세 PD들을 보며 대단하다고 느꼈다. 가본 적 없는 나라들이 친숙하게 느껴지고 정이 가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촬영과 편집, 훌륭한 말솜씨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닐 거다. 이 감정을 나눌 두 번째 주자로 엄마를 생각했고, 바로 책을 건네드렸다.

“그냥 네가 내 소감까지 적고 내면 안 되려나?” 아무래도 퇴근 이후 이것저것 하느라 바쁜 와중에 시간 내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일 것이다.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며 고른 책인 것을 어필하고, 몇 년 전 함께 갔던 해외여행을 떠올리며 읽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덕에 책은 다행히 엄마에게 넘어갔다. 며칠 뒤 내게 책과 함께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책 내용이 여행 당시를 떠올리게 해줬다’는 감상평이 돌아왔다. 이 책은 나의 추억뿐만 아니라 엄마의 추억도 담겨있기에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읽기에 충분했다.

세 번째 주자로 가족 같은 ‘지인’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낸 사람은 바로 경자 이모다. 경자 이모는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이모이자, 엄마의 지인이다.

이모는 흔쾌히 승낙하면서 동시에 “이거 무슨 과목이길래 책 한 권을 여러 명이 돌아가며 읽어야 하는 게 과제야?”라고 물으셨다. 내 상황과 가족 독서 릴레이에 관해 설명해드리니 신기한 과목이라고 하셨다. 얼마 후 책과 함께 ‘바느질이 취미인 나에게 프랑스 당텔이라고 부르는 수제 레이스 가게들이 눈길을 끌었다. 작품들을 실제로 보면 얼마나 황홀할까~’라는 소감이 돌아왔다. 이모는 손재주가 뛰어나 가방, 옷, 머리 끈 등을 다양하게 만드시곤 한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직접 가방을 만들어 선물로 주셨다.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멜 일이 없어 옷장에 두고 안 메던 가방이 떠올라 좀 메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번째 주자는 우리 가족과 유럽 여행을 떠났던 한라대학교 신 교수님이다. 교수님께서도 자녀분들과 함께한 가족 유럽 여행이었기에 같이 책을 공유하면 좋을 거 같아 부탁드렸는데 정성스럽게 종이 두 장에 소감을 프린트해 건네주셨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서두로, 여행에 대한 소감과 이 책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는 좋은 말씀을 남겨주셨다. 어쩌면 이 책은 여행객들의 길잡이뿐만 아니라, 현재 나를 여기로 안내해준 길잡이의 역할도 동시에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끝낼 계획이었던 내 독서 릴레이는 11년생 재형이와 14년생 윤아가 마지막을 장식해줬다. 재형이와 윤아는 경자 이모의 자녀로, 엄마가 밤마다 책을 읽고 소감을 써 내려간 모습이 신기했는지 본인들도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책을 한 번 더 경자 이모께 전달했다. 예전에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좋아한 프로그램을 책으로 읽게 된 지금의 초등학생은 어떤 생각으로 읽을지 그들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마침내 책이 마지막 주자를 거쳐 돌아왔다. 역시 아이는 아이인가. 재형이는 한 쇼핑센터에서 파는 초콜릿이 맛있어 보인다는 소감을 남겼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때 봤던 방송에서는 강물이 흐르는 게 멋져 보이고, 우리나라 사람이 해외 가서 외국인들과 소통하고 지내는 모습이 신기했고, 그곳에서 먹는 음식들 대부분은 맛나 보이기도 했던 거 같다. 윤아의 경우 엄마도, 아빠도 아닌 오빠가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여행을 갔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남겼다. 올해 13살인 친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가족여행 갔으면 좋겠다니… 흔히들 말하는 현실 남매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어디에나 있나 보다.

가족 독서 릴레이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가족을 생각하며 골랐던 책이었으나, 가족처럼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까지 책을 읽고 적어준 소감들을 보며 그 속에서 잠재됐던 내 기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더 나아갔기에 이런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독서 가족’이 생겼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여러 상황에서 내게 힐링과 도움을 준 책이라 느껴진다. <2023 출판문화론/변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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