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 빈껍데기가 된 나를 받아주다. 

" 자유로운 이 나라에서조차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며 삶이 주는 달콤한 열매를 맛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고된 노동에 찌든 사람은 열매를 딸 수 없고 인간의 참다운 고결함을 유지할 수 없다. 다른 사람과 인간다운 관계를 이어 갈 여력이 없다. "    - 월든 중에서 - 

  무엇이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는가.  한 걸음을 내민 것조차 당시의  나에겐 벅찼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멈춰 섰다.  멈추는 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 의미는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간 모든 노력이 사라지는 것보다 그 무엇도 아닌 내가 먼저였다. 

그런 상태로 온 제주도에서 『월든』이란 책을 접했다.  읽는 내내 그간 있었던 나의 이야기와 가족들이 떠올랐다.  4학년 1학기를 다니고 있던 내가 휴학한다고 했을 땐, 아빠는 내 선택을 존중했다.  동생은 나를 응원했다.  엄마는 걱정했다.  나도 느꼈다.  지금 시기는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계속 가야 한다는 것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은 이미 내게 없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답답한 마음이 '쉬고 싶다.' 라고 내게 계속 말하고 있었다. 

탈진한 상태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기운이 다 빠져 빈 영혼만 남은 빈껍데기.  그건 나였다.  모든 게 두려웠다.  무섭고 눈치가 보였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내겐 크게 다가왔기에.  당시의 감정은 그랬지만 이제는 나의 상처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모든 걸 정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나를 반겨주었다.  우린 가족이라는 단어 안에 묶여 있는 존재.  결국은 서로를 위해 각자의 의견을 내놓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애정이 담겨있다.  나를 소중히 아껴주는 엄마, 아빠의 품속이 따듯했다.  내가 돌아갈 곳이 있어서, 우리 가족이 살아있어서 행복감을 느꼈다.  휴학기간 빈껍데기였던 나는 나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환경의 변화, 다시 내딛는 시간을 가지다. 

" 자연과 인간의 삶은 우리의 기질만큼이나 가지각색이다. "  -월든 중에서- 

  휴학 후 가장 먼저 떠난 여행지는 제주도였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내게 적당히 멀고 가까운 곳이었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는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할 때 나만 이곳을 떠나는 후련한 감정이 들었다.  여행지를 다니고 바다를 보면서 제주에서의 삶이 궁금해졌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비행기를 타고 떠나오는 곳.  여기서 과거의 나를 잊고 싶었다. 

그 여행으로.  나는 제주대로 편입했다.  사실 도망이었다.  달아났다.  나에게서.  그렇게 새로운 전공을 배우면서 나의 두 번째 3학년이 시작되었다.  누가 3학년을 2년 동안 할 줄 알았겠는가. 진짜 인생은 알 수 없다.  이곳에서  대학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도 생활할 수 있는 거라는 것을 알았다.  심적, 시간적 여유가 무척이나 달콤했다. 

엄마, 아빠는 내게 즐기다가 오라고 했다.  제주에서의 생활을.  편입도 반대했던 엄마가 이제는 가장 많이 응원해준다.  제주도에서 하늘과 나무를 많이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서 저 멀리 보이는 바다.  그곳은 내가 언제라도 바다로 찾아와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기에 난 그게 좋았다. 

이때까지는 나는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사람이었다.  경계심이 많았던.  철저히 혼자가 되었기에.  가끔 외딴섬에 혼자 있는 듯했고, 너무 멀리 온 것 같아서 눈물로 지새웠던 밤도 있었다.  그걸 나중에 부모님께 말하니 힘들면 언제든 오라고 해주셨다.  부모란 존재는 나무 같다.  언제나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안아준다.  내 동생도 나에게 큰 힘이 된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학교에서 길을 걸을 때도 주변에 있는 자연이 모두 내 친구라고 생각하니 달리 보였다. 

중요한 기회,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나의 길을 찾다. 

" 인간의 운명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따라 결정, 암시된다. "  -월든 중에서- 

  제주에서의 모든 시간은 나의 모험이었다. 나를 찾아가는.  어느덧 끝이 보인다.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원하는 목표를 향한 과정의 어려움도 이겨낼 힘이 생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역경의 시간을 지나면서 간절히 원하는 게 뭔지 알았다.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난 다시 일어나기 위해 채워지고 있었다. 

자꾸만 외면할수록 내가 원하는 게 선명해졌다.  아빠는 이제 내게 더 이상 현실을 회피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  이제는 학교가 아닌 사회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혼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넓혀가야 함을 마음속에서 정리했다.  그러고 나니 이제야 다시 웃음이 난다.  다시 사람들과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눈을 마주치는 게 어렵고 무섭지 않다.  치유되니 내가 좋아했고 사랑했던 내 모습을 되찾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변화하고자 했기에 가능했다.  나는 날 다독이고 단련시킬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끝났다. 

모험에 대하여 

  나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 가족은 서로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간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아빠는 내게 각자만의 삶을 살아야함을 말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가족이 먼저였다.  엄마는 한국에서 여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현실적으로 알려주었다.  동생은 늘 변함없이 본인이 추구하는 바를 흔들리지 않고 다가갔다.  각자의 위치에서 모험을 하며 본인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내가 했던 모험의 의미를 알고나니 모든 게 아무렇지 않았다.  괜찮아졌다.  제주도에 와서 나를 알고 다독였다.  내가 오롯이 있을 수 있게 되니 타인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모험의 끝자락에서 가족과 사랑, 친구, 삶의 의미를 알았다.  감사함을 느끼며 주어진 시간 속에서 본인을 찾기 위한 여정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2023 출판문화론 / 이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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