볍씨학교 제주학사 모습.
볍씨학교 제주학사 모습.

조천읍 선흘동1길 35-7. 지도를 따라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니 ‘볍씨학교’라 새겨진 작은 간판이 먼저 반긴다. 켜켜이 쌓인 돌담집과 그 옆에 펼쳐진 농지. 분식집 떡볶이 냄새 대신 흙냄새가 풍기는 이곳은 학교보다 자연을 더 닮은 볍씨학교다.

볍씨학교는 2001년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대안학교로 경기도 광명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현재 제주도 선흘분교에서 교장을 지내는 이영이씨가 그 설립자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던 시절 노동자 교육을 펼쳤고, 이후 시민교육까지 범위를 넓혀 갔다. 교육은 곧 교육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지만, 그 움직임은 ‘빨갱이’라는 낙인을 몰고 오기도 했다.

“학교가 더 민주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교육 개혁) 활동을 시작했어요. 탄압도 받고 힘들었죠. 학교 안에서 공교육을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차라리 다른 대안을 만들어서 또 다른 교육을 제안하는 게 더 빠를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대안학교를 만들었습니다.”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인연을 맺은 YMCA(한국기독교청년회)는 대안학교 설립 추진의 원동력이 됐다. 이 교장은 지역의 공동체성과 자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뜻을 나눈 광명YMCA 회원들과 볍씨학교를 세웠다.

◇성적 걱정? ‘수확물’이 고민인 아이들

볍씨학교는 ‘생명이 소중한 세상,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이념에 걸맞게 생태적 생활 중심 교육을 지향한다. 아이들은 교실이 아닌 풀밭에서 뒹굴며 몸과 마음으로 배운다. 생명력을 삶 속에서 펼쳐내며 ‘만나는 생명들과 차별 없이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을 길러내는 게 볍씨학교의 목표다.

총 9년의 초중등 교육 과정 중 졸업을 앞둔 중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수업 시간이 주어진다. 8년 동안 배우고 익힌 삶의 지혜를 토대로 스스로의 삶을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학생들은 1년간 부모와 떨어져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는 연습을 한다. 이들이 새 터전을 꾸려나가는 곳이 바로 선흘분교다.

고사리를 꺾으러 가기 전 볍씨학교 아이들이 이영이 교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고사리를 꺾으러 가기 전 볍씨학교 아이들이 이영이 교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학생들은 직접 거둔 농작물로 끼니를 해결하고 아르바이트하는 등 자급자족하는 삶을 실천해 나간다. 교과서가 알려주지 않는 실질적인 생존법들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기 한계와 부딪히고 이를 돌파하려 계속 도전한다. 이 교장은 “요즘은 농사할 때 삽을 잘 쓰지 않지만 우리는 일부러라도 더 삽을 쥐게 한다”며 “포기하고 싶고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아도 뒤를 돌아봤을 때 쌓여 있는 흙을 보면서 학생들이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자연스레 노동이 창조해 낸 세상을 깨우치며 내가 얼마나 세상에 필요한 존재인지를 인지한다.

열두 명이 부대껴 생활하다 보니 학생들은 이제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한다. 볍씨가족의 하루 끼니를 책임져야 하는 밥지기가 된 날이면 학생들은 기지를 발휘해 낸다.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메뉴를 정하고, 제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맛이 탁월하지 않더라도 타이르는 이 없이 모두가 묵묵히 친구의 성장을 기다려 준다. 시간은 걸려도 실력은 늘기 마련이니까. 

◇볍씨학교만의 특별한 수학여행

학교와 마을은 떼어놓을 수 없다는 볍씨학교의 교육 철학을 보여주듯 학생들은 여러 형태로 지역 사회에 목소리를 내왔다. 지난 제주자연체험파크 사업 반대 기자회견에서 학생들은 ‘곶자왈을 지켜달라’고 외쳤고, 올해 제30회를 맞은 4.3예술축전에서 준비한 거리굿을 선보였다. 교육의 목적도 있었지만 매 순간 학생들은 엄연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임했다.

4월 13일 열린 제30회 4.3예술축전에서 볍씨학교 학생들이 4.3 거리굿을 선보이고 있다.
4월 13일 열린 제30회 4.3예술축전에서 볍씨학교 학생들이 4.3 거리굿을 선보이고 있다.

볍씨학교에도 물론 수학여행은 있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나’를 찾아가는 수학여행이다. 여행지부터 여행경비까지 모두 학생들이 계획한다. 이번에 아이들이 써온 여행계획서 내용은 이랬다. ‘코로나19 극복하는 프리 하이파이브’, ‘집중력 기르는 삼보일배 여행’, ‘사람들 앞에서 기타 공연하기’…. 나의 결점과 마주하는 4박 5일의 여정을 아이들은 어떻게 보냈을까.

약한 의지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해민(17)군은 세 번 걷고 한번 절하는 삼보일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해민군은 “사실 이 주제 자체도 회피하고 싶었는데 조금만 힘들면 금방 놔버리는 안 좋은 습관을 고치겠다는 마음으로 여행하게 됐다”고 여행 계기를 밝혔다. 여행 중 힘들었던 점을 묻자 해민군은 “꼽을 수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여행을 떠난 10월에도 햇볕이 뜨겁긴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덤이다. 해민군은 “그동안 나의 내면의 문제는 들여다보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집착하며 살아왔다”며 “여행이 끝날 즈음에는 어느 정도 이겨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여행 도중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난 학생도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플라스틱 만다라를 만들기로 한 배재우(17)군은 여행 첫째 날 비가 와 선뜻 시도하기가 어려웠다. 궂은 날씨에 혼자 떠도는 재우군을 보고 한 시민은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했다. 굴곡도 많았지만 그만큼 성취감도 컸던 여행이라고 재우군은 말했다.

제주시 삼도이동 관덕정 앞에서 배재우(17)군이 플라스틱 만다라를 만들고 있다.
제주시 삼도이동 관덕정 앞에서 배재우(17)군이 플라스틱 만다라를 만들고 있다.

◇정작 대안학교 청소년을 ‘학교 밖’으로 내모는 건…

볍씨학교와 같은 비인가 대안학교는 공식 학력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아 아이들은 졸업 전 미리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입시 중심의 공교육에서 아이들을 해방하려는 설립 의도에 어긋나지만, 그렇다고 대안학교를 향한 왜곡된 인식을 쉽게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드물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일반 고등학교로 들어가는 학생도 있다. “대안학교는 삶을 배우는 학교예요. 정말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는 학교. 생명을 이해하고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 대안학교예요.” 이 교장은 이름만 ‘대안학교’인 교육 기관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형세를 두고 대안학교에 대한 뚜렷한 이해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인식'은 학교 존폐를 좌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자연이 교실인 학생들의 학습권은 재개발 사업으로 늘 위태롭다. 이번엔 신도시 계획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3기 신도시 광명시흥공공주택지구 부지에 포함되면서 볍씨학교가 ‘또’ 폐교 위기에 처했다. 5월 4일 광명본교 학생, 부모, 교사들은 국토부를 찾아가 야외수업을 진행했다. 틀림없는 학교의 모습이었다. 동등하게 배울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광명시의회는 볍씨학교 존치 요구 결의문을 채택했지만, 기약 없는 투쟁이 막을 내릴지는 미지수다.

5월 4일 광명본교 학생들이 국토부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직접 만든 피켓에는 '하나뿐인 볍씨를 지켜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5월 4일 광명본교 학생들이 국토부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직접 만든 피켓에는 '하나뿐인 볍씨를 지켜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볍씨살이 2년이면 못할 게 없다!

제주에서 보낸 1년이 부족하다고 느낀 해민군과 재우군은 졸업 후에도 학교에 남기로 했다. 선배들이 하던 템페(인도네시아 전통 콩 발효 식품) 사업도 지금은 볍씨살이 2년 차 학생들의 몫이다. 특히 재우군은 이 사업에 재미를 붙였다고 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두 학생 모두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서도 나름 진지하게 답변했다. “(볍씨학교에서) 치열하게 아르바이트도 하고 새벽까지 프로그램 기획도 하면서 꽉 찬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그래서 더 활발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집에만 있으면 게임만 하고 다시 게을러질 것 같고…. 계속 움직이면서 생동감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단련이 필요하다며 자원해 학교에 남았다는 해민군. 자신을 엄격하게 돌봐나가는 중이다.

“개인 여행을 다녀온 기억이 강렬히 남아있어서 또 혼자 여행하고 싶어요. 추억도 많이 남기고 혼자만의 생각도 오래 할 수 있어서 좋았거든요. 아, 그리고 건축이나 디자인 분야를 공부해 보고 싶어요. 그 전에 검정고시를 먼저 봐야 하겠지만요.” 학교에서 쌓은 경험이 많아 관심사도 다양해진 재우군은 이내 쏟아지듯 이야기했다. 독서량이 많아 글도 잘 쓴다는 재우군에게 검정고시는 어려운 과제가 아닐 듯하다.

볍씨학교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일’은 막연한 진로가 아닌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 두 학생이 준 답변의 또 다른 공통점은 ‘볍씨학교’가 발판이 되었다는 것. 어떤 모양으로 자랄지 예측할 수 없는 볍씨 같은 아이들이라 미래가 더 기대된다.

한편 광명본교 재학생 대상이었던 선흘분교가 제주 학생들을 위해서도 문을 열었다. 이 교장은 “제주 청소년들이 겪는 입시 스트레스가 다른 시도와 비교했을 때 더 크다”며 “꼭 볍씨학교가 아니더라도 제주에 다양한 대안학교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2023 신문제작실습/ 고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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