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만든 그 시절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매년 외할머니 텃밭에서 방울토마토를 키웠다. 넓지도 적지도 않은 텃밭. 그 텃밭에 가면 햇빛에 반짝이는 싱그러운 오이, 물방울이 대롱대롱 맺혀있는 고추, 주먹 크기만큼 자란 수박, 불그스름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방울토마토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린 우리와 바쁜 부모님은 자주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래도 할머니의 보살핌 덕에 방울토마토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덧 선선한 여름이 오면 우리는 할머니를 도와 잘 자란 채소와 과일의 수확을 도우러 갔다. 동생과 나는 할머니의 휘황찬란한 작업복을 빌려 소맷단과 바짓단을 걷어입었다. 하지만 어린 우리는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를 따서 어른들의 입에 넣어주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일이 끝나면 우리는 나무 그늘 밑 정자에서 수확물을 나눠 먹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일했지만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소쿠리 한가득 쌓여있는 채소와 과일을 보면서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가족 ‘대단이’

햇살을 듬뿍 받고 있는 대단이. 사진=조승주

시간이 흐르고 나는 성인이 되었다. 1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여름이 올 때마다 나는 그때가 떠올랐다. 매번 평화롭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다시 느끼고자 이번 어린이날 바질을 심어보았다.

낯선 제주에 정착해 크게 마음 둘 곳 없었던 5월. 친구 사귀기도, 공부하기도, 아르바이트하기도 바쁜 나날이었다. 그래도 어릴 적 좋았던 기억을 발판 삼아 살아가는 나이기에 바질을 키우는 일이 나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깊이로 흙을 파서 깨알보다 작은 씨앗들을 심었다. 일주일 정도 물을 듬뿍 주고 햇볕을 쬐어 주었더니 금세 싹이 올라왔다. 또 일주일이 지나자 떡잎이 생기고 좁은 화분 속에서 서로 한 자리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손톱만 한 잎들이 자라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빠르게 자라나는 모습이 기특해 ‘대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대단이는 나의 자취방 베란다 밖으로 햇볕이 가장 잘 들고, 바람이 잘 부는 곳에 있다. 매일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자마자 ‘얼마나 자랐나?’ 궁금해하며 베란다 문을 연다. 물을 주며 대단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얼마나 자랐는지 사진을 찍으며 어제와 비교한다. 아침마다 열심히 자라는 대단이를 보면 하루를 힘차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반려 식물이라는 단어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생각했다.

가끔 대단이를 집에 두고 육지에 다녀오거나 활동을 나가게 되면 괜스레 미안해진다. 하루 이틀 물을 주지 않는다고 대단이가 죽거나 사라지지는 않지만, 하루에 한 번 보지 않으면 하루가 허전하다.

밖에 있을 때 비가 오는 것을 정말 싫어하지만 집을 비우는 날이면 비가 왔으면 한다. 나는 추적한 비에 앞머리가 젖어 갈라지고, 우산에 차마 다 들어오지 못한 가방이 젖어도, 물웅덩이를 밟아 신발이 눅눅해져도 대단이를 생각하면 비가 왔으면 한다.


특별한 대단이와 소중한 사람들

예전에 키웠던 방울토마토와는 다른 느낌이다. 내가 심고 키운 방울토마토에 정이 있긴 했어도 대단이만큼은 아니었다. 자주 보지 않아서일까. 먹어도 상관없고 누군가에게 나누어줘도 크게 마음 상하지 않았었다. 대단이는 행복했던 기억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어서인지 매일 인사를 나누면서 정이 들어서인지 특별하다.

대단이를 보면 지금은 곁에 없는 외할머니의 걱정 어린 얼굴이, 엄마의 포근한 품이, 동생의 해맑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들과의 추억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그만큼 대단이는 지금 나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대단이를 수확해서 먹을 수 있을까?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을까? 대단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잎이 거의 다 자랐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바질을 수확해 먹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정답 없는 질문이다. 대단이를 통해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새로운 좋은 추억을 만들었기에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싱그러운 대단이와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조승주/2022 저널리즘문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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