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을 때는 어떻게 될까?'

늘 자신의 죽음이 궁금했던 그는 성당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했었다. 그는 봉사하며 만났던 사람들이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모습에 연민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온 성당 사람들이 그에게 좋은 봉사가 있다며 호스피스 봉사를 소개해 줬다. 그는 이것을 듣자마자 자신이 찾아왔던 일이라며 곧바로 봉사를 시작했다. 1994년, 신 씨는 그렇게 호스피스 봉사자가 됐다.

이제는 머리가 모두 새하얀 흰색으로 덮이고, 손에는 자잘한 주름들이 잡힌 신 씨의 모습에서 그가 오랜 기간 봉사를 해온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봉사 활동에 대해 조금도 으스대지 않았다. 신 씨에게 있어 호스피스 봉사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하는 일. 그것뿐이었다.

여든이 가까운 그는 24살의 대학생과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다소 어색한 듯 보였다. 더군다나 50년의 나이 차를 두고 죽음에 관해 얘기하는 상황이 그에게 한층 더 낯설게 다가왔을 것이다. 신 씨는 이내 어색함을 뒤로 하고 옅은 미소를 띠며 호스피스 봉사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대화를 하고 있는 신 씨의 모습
대화를 하고 있는 신 씨의 모습

"호스피스 활동은 죽음을 앞둔 분들을 돌보는 일이에요"

신 씨는 사람들이 죽음을 앞두면 누구나 당황하고 어려운 일이 많다고 말했다. 신 씨가 생각하는 호스피스 봉사는 그 사람들이 안정을 찾고 편안하게 세상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몇 초간 생각에 잠기더니 오래전 자신이 만났던 한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보통 우리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가면 환자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니까 시큰둥해서 말을 안 합니다. 그러면 저희는 억지로 말을 거는 게 아니고 그냥 가서 옆에 앉아만 있는 거예요. 그렇게 다섯 번, 여섯 번 갔을 때쯤 할머니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죠."

그는 할머니가 말을 하고서야 자신이 성당에서 온 봉사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할머니가 자신의 얘기를 마구 털어놓는다.  살면서 억울했던 일이나 가슴에 한이 맺힌 일,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는 얘기까지. 그는 할머니가 마치 말동무를 기다린 사람처럼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이때 우리 봉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할머니에게 공감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할머니가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려요. 할머니한테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거예요. 이건 호스피스 봉사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어떤 얘기를 하든 우리는 그냥 지지해 주는 사람이에요."

신 씨는 할머니 얘기를 계속 이어가며 호스피스 봉사자가 해야 하는 또 다른 역할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바로 환자와 환자의 가족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뚫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암처럼 큰 병에 걸리면 환자에게 어떤 병에 걸렸는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행여나 환자가 충격을 받아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했던 탓이다.

"환자가 돼서 입원을 하면 상당히 예민해져요. 자기가 있는 병동이 어디인지 자꾸 둘러보고, 평소에 안 보던 사람들이 찾아오면 환자도 점점 이상함을 느끼죠. 나중에는 결국 환자도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돼요. 하지만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않으니까 벽을 만들어서 입만 꾹 닫고 있는 거예요."

그는 이 벽을 허물어 환자와 가족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호스피스 봉사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특히 신 씨는 자신도 나이가 많아서 곧 따라갈 테니 너무 겁먹지 말라고 말하며 환자를 안심시킨다고 했다. 그는 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비로소 환자와 가족들이 죽음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며 봉사자의 역할을 다시금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준비란 환자와 가족들이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호스피스는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들도 돌보는 일이에요"

신 씨는 호스피스 봉사가 환자를 돌보는 일이면서도 환자의 가족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환자의 임종이 가까워지면 환자의 가족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눈물을 흘리며 당황한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환자도 덩덜아 불안해하므로 호스피스 봉사자가 편안히 임종을 맞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의 임종이 가까워지면 저희는 환자 바로 옆에 앉아요. 그리고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지 물어봐요. 환자는 말을 하기 힘드니까 눈을 깜빡이거나 손을 까닥거리는 방법을 통해서 저희가 대답을 듣죠. 저희는 어떤 얘기도 다 알아듣고 전달할 수 있어요. 누구한테 할 말이 있는 건지,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그렇게 환자의 마지막 얘기까지 모두 전달하고 나면 장례를 준비하는 것 또한 호스피스 봉사자의 몫이다. 장의사도 소개해 주고, 관은 어떤 관이 더 좋고 가격은 얼마인지. 신 씨는 환자의 가족들도 죽음을 마주하는 게 낯설기 때문에 옆에서 이끌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장례가 끝나서도 봉사자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장례가 끝난다고 해서 우리 일도 끝난 것이 아니에요. 유가족들도 장례가 끝난 후에 고인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잖아요. 그 사람들을 내버려 둬서는 안 돼요. 그들이 장례를 치른 후에 작별을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우리 호스피스 봉사자가 해야 하는 일이에요."

신 씨가 말하는 호스피스 봉사는 단순히 환자를 돌보는 일이 아니었다. 환자와 환자의 가족 사이에서 다리 역할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의 안정을 돌보는 것 또한 모두 호스피스 봉사자의 몫이다. 그는 환자가 두려워하지 않은 채 편안히 임종을 맞고, 가족들도 작별을 잘 견뎌냈을 때야 비로소 이 활동의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신 씨를 처음 만난 한 성당의 벤치
신 씨를 처음 만난 한 성당의 벤치

"호스피스 봉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신 씨는 자신이 과거에 돌봤던 환자에 대한 얘기를 멈추고, 자신이  마주해야 할 죽음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도 죽을병에 걸리면 누군가에게 호스피스 봉사를 받는 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호스피스 봉사는 자신을 위한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여든이 가까운 그는 이미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며 자신의 얘기를 털어놨다.

"저는 사실 될지는 모르겠지만 암에 걸려서 죽기를 원해요. 다른 병과 다르게 암은 남은 시간을 거의 정확하게 알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 시간 동안 삶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는 거죠. 저도 이제 팔십이 가까이 됐으니까 옷이나 책 같은 것들을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줘요. 내가 돌아간 후에 주면 안 받아요. 그래서 미리 물건을 나눠주며 지금도 팔면 얼마 정도 할거라고 말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거부감없이 받을 수 있어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신 씨의 모습에서는 어떠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그저 남에게 하나라도 더 베풀기 위한 시간일 뿐이었다. 그가 평생 해 왔던 호스피스 봉사는 어쩌면 환자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 또한 준비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신 씨는 대화를 나누며 처음으로 나에게 군대를 다녀왔냐고 질문을 했다. 아직이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군대 문제도 있고, 학교생활, 진로 생각같은 많은 고민이 있을 거예요. 이것들은 진짜 조금씩 이뤄가야 해요. 이걸 한 번에 해결하려는 욕심을 가지면 안 돼요. 하나하나 천천히 확실하게 이뤄가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주변을 한 번씩 둘러보면서 누구에게나 조금씩 연민을 가지고 살아가면 선한 삶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신 씨와의 대화는 이 말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해 온 그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신 씨가 가졌던 작은 연민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다. <2022 신문제작실습/ 김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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