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나의 철부지 시절의 이야기이다. 본격적으로 수능을 준비해야 하는 고등학교 3학년보다 하나 낮은 2학년이라는 딱지는 왠지 모르게 학업의 부담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해외여행, 펜션, 캠핑 등의 놀러가자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었다. 여러 좋은 의견들이었지만 최대한 저렴한 가격에 가장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다 나온 의견은 도보 여행이었다. 교통비를 최대한 아끼며 오랜 시간동안 재밌게 놀 수 있을거란 생각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찬성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데다가 남자들끼리의 여행에서 꼼꼼하게 계획을 짜오는 일이란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도보여행'이란 어정쩡한 계획만 생각해 둔 채 시간을 보냈다. 여행에 대해 거의 잊혀질 때쯤 방학이 됐고 그제서야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을 싸고 나선 집 밖은 평소보다 상쾌했다.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씨였지만 콧속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온몸을 통과하는 듯 했다.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친구들과 만나러 걸어갔다. 447번 버스를 타고 이호해수욕장을 거쳐 용담동에서 친구들과 만났다. 반바지,반팔 차림의 편안한 복장으로 만난 친구들은 누구랄거없이 모두 들떠보였다. 그렇게 우리들의 여행은 시작됐다.

산책 중 찍은 제주 해변의 모습(촬영=홍정민)
산책 중 찍은 제주 해변의 모습(촬영=홍정민)

 

 무계획이 계획이란 생각으로 정해둔 거 하나 없이 떠난 여행의 시작은 예상외로 순조로운 듯 했다. 햇빛으로 반짝거리는 에메랄드 빛의 바다를 보며 걷다가도 맛집의 향기를 한껏 풍기는 음식점에 들어가 배부르게 먹기도 하고 찌르르 대는 풀벌레 소리를 음악 삼아 밤하늘을 보며 의자에 앉아 쉬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무계획의 여행은 결국 얼마 못 가 많은 걸림돌들에 부딪혔다. 생각 없이 물 흐르듯 써버린 돈은 결국 우리가 준비했던 예산을 초과해버렸고 우리는 어린 나이에 먹을 것보다는 노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객기를 부리며 끼니를 거른 채 놀았다.

 오직 놀기만을 위해 구한 싸구려 숙소는 처음 도착한 우리를 쾌쾌묵은 향으로 반겨주었다.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니 놀면서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몰려왔고 얼마 안 가 숙소 안은 꼬르륵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친구들과 여러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부모님께 돈을 보내달라 하려니 너무 늦은 시간이고 그대로 잠들기에는 너무 허전한 속이었다. 더이상 참을 수 없어 결국 친구들과 함께 숙소 옆에 위치한 가정집에서 저녁밥을 동냥하기로 했다. 친구들과 나 모두 싹싹한 성격이 아닌 탓에 들어가기도 전에 얼굴을 붉히며 여러번의 친구들과 침묵의 가위바위보를 했다. 누가 앞장설지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서너번의 치열한 결투 끝에 보를 낸 내가 지고 말았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누군가에게 부탁조차 못하는 나였지만 배고픔이 낯가림보다 우선이었던 것 같다.

 한참을 주저하다 문을 두드렸고 얼마 안되어서 열린 까만 미닫이문에서 연세가 지긋해보이시는 할머니가 환하게 맞아주셨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주저하다 '혹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라는 말로 무거운 입을 열었다. 할머니께서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들어오라는 말씀과 함께 밥상을 펼치고 반찬을 꺼내기 시작했다. 옛날 느낌이 나는 벽지와 틀어놓으신 정겨운 드라마 소리는 마치 친할머니 집에 온 기분을 느끼게 했다. 밥그릇을 가득 채운 하얀 쌀밥과 얼마 없는 반찬들이었지만 그때의 저녁 식사는 지금까지 먹어본 식사 중 가장 맛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는 식사였다고 생각한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할머니께 감사하단 말씀과 함께 다시 숙소로 돌아가 단잠을 청했다. 다음날엔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부모님께 전화해 돈을 받아 급하게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이후 수년간 학업에 매진하느라 이 일에 관해 잊은 채 살고 있다가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성인이 되어 만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던 중 우연히 할머니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잘 살고 계실까','다시 찾아뵈러 가야 되는데' 등의 웃어넘길 수 있던 얘기였지만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여행을 떠났던 18살의 그때처럼 무작정 다시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때는 할 수 없었던 운전을 하며 다시 같은 코스를 돌기로 했다. 어릴때와 다를거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과 같이 진한 에메랄드 빛의 바다를 보며 드라이브를 했지만 예전처럼 들뜬 마음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 충분한 시간에도 바쁘게 돌아다녔다. 우리들끼리 서로 얘기는 안했지만 목표는 서로 같은 것을 생각했었을 것이다.

 충분히 돌아다닌 후에 예전 그 숙소에 들어갔다. 예전과 같은 방은 아니었지만 추억을 느낄 수 있는 쾌쾌한 향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샤워를 하고 할머니께 드릴 반찬거리와 밥을 사서 옆집 문을 다시 두드렸다. 이번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오히려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불 꺼진 집에서의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기다려서라도 다시 만나 뵙고 싶었지만 주변 주민분의 얘기로는 몇 년전에 이사를 가서 더이상 사람이 안사는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친구들과 재밌었지만 실망이 섞인 여행을 끝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지만, 아직도 여행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다. 무더운 여름날보다 더 따스했던 할머니의 마음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어디서든 언제든지 우연하게라도 다시 한 번 그 할머니와 만나고 싶다.<2022 저널리즘 문장론/홍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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