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 속 할아버지와 어린 나
                                                                                                                                                       가족사진 속 할아버지와 어린 나

오전 5시, 새벽의 적막을 깨는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지영아, 할아버지 돌아가셨대.”

“응. 알아.”

 

10살이던 내가 외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답한 말이다긴 꿈을 꾼 후였다. 

 

성격 불같기라면 빼고 말할 수 없고, 어느 동네에나 있는 호랑이 할아버지. 노량진에서는 단연 우리 할아버지 담당이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부처님처럼 큰 귀, 나이에 비해 큰 키까지. 성격과 딱 맞는 외모셨다. 그런 인물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나의 탄생이다. 첫 손녀라 불면 날아갈 듯 쥐면 꺼질 듯 안았다가, 업었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고 한다. 기억나는 가장 오래전 일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하교 시간에 맞춰 정문 앞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 모습이다. 저 멀리서 ‘할아버지’ 외치며 달려오는 손녀의 얼굴을 마주하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미소를 지으셨다. 기억 속 그 순간의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토요일에도 격주로 학교를 나갔는데, 그날도 학교 가는 토요일이었다. 하필 하교 후에 바이올린 교습까지 있어 주말마다 집에 오시던 할아버지도 만나지 못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할아버지가 돌연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디 편찮으신가? 걱정됐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의 생각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그날도, 평소처럼 동생과 장난치다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눈 떴을 때,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걷고 있음을 인지했을 때는 긴 복도 위였다. 생명력을 느끼기 어려운 온도 때문에 실내인지 실외인지 헷갈렸다. 너무 공허하고, 숨이 막혀서 마치 우주에 있는 느낌도 들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 덕이었을까? 무서울 법했던 그곳을 신기해하며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끝에 닿은 곳은 방문 앞이었다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본능적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자 마주한 건 정사각형의 넓고, 하얀 방이었다. 그 중간에 놓인 갈색 관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관이 어디에 쓰이고,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그냥 손이 가는 대로 관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할아버지가 눈을 감고 누워 계셨다.

 

“할아버지, 왜 여기 누워있어? 우리 집에 가자.”

“ … ”

 

자그마한 몸으로 할아버지를 부축하려고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그러자 감겨있던 할아버지 눈이 떠졌다. 할아버지는 상체만 세운 자세로 앉아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셨다. 그 표정은 나를 바라보던 여느 날처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나를 안고,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러고는 다시 누우며, 관 뚜껑을 닫으셨다. 너무 놀라 다급하게 관 뚜껑을 열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눈 떴을 때, 다시 마주한 세상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2008년 11월 5일 오전 5시, 인생 처음으로 ‘죽음’을 배운 날. 겨우 10살이던 그해, 단 하루의 꿈으로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했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꿈 때문이었을까. 아빠의 슬픈 문장에 이미 알고 있는 일인 듯 자연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꿈은 할아버지와 나누지 못했던 인사였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사랑은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졌고, 진심 어린 사랑이라면 어떻게든 닿는다는 것을 배웠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사건, 한참 지난 지금에야 이해할 수 있는 그 일을 이렇게 다시 기록한다. 너무 벅차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정, 너무 사랑해서 차마 사랑할 수 없던 꿈이라고. 

 

<장지영/2022 저널리즘문장론>

저작권자 © 제주대언론홍보학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