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어린 아이를 치고도 제 갈 길 가는 모습에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건 대답 없는 여섯 번의 총성뿐. 1947년 제주는 푸르지 못해 붉게 물든 섬이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중 가장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4.3사건은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로동당을 타파한다는 명분 하에 서북 청년단의 주도로 도민을 무차별하게 학살 한 사태를 의미한다.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이유로 중산간 지역에 출입하는 자는 모두 총살하겠다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과 함께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은 하나둘 쓰러져갔고, 해안으로 도망쳐 온 피란민조차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 아래 학살의 대상이 됐다. 7년간 이어진 무차별한 살인은 도내 134곳의 마을을 불태우며 무려 1만 4천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는 참상을 만들었다.

 2006년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사과 이후 4.3 특별법이 시행된 지금, 그날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70년 전 그들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기억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점차 사라지는 ‘잃어버린 마을’을 기억으로 되찾기 위해 삶의 터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종남 마을과 피란 온 굴속에서 잔인하고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다랑쉬 마을을 찾았다.


70년 전 멈춰버린 공간, 잃어버린 마을 종남

종남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의 모습.
종남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의 모습.

 붐비는 도로에서 벗어나 차가 한 대 겨우 빠져나갈 듯한 좁은 길을 통과하면 마주하게 되는 울창한 대나무 숲,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에 위치한 잃어버린 마을 종남이다. 마을이 위치한 와산리는 본동과 새비보리, 섯가름 등 여러 공동체로 이루어진 중산간 지역으로 1948년 11월 20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 의해 모두 불에 타 소멸돼버렸다. 이후 와산본동은 재건에 성공했으나, 종남 마을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남겨져 유일하게 4.3사건 당시의 유적이 남아있는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당시 마을에서는 대나무를 심어 생활 용품을 만드는데 이용하고, 토벌대가 찾아올 무렵에는 날카롭게 깍아 저항하는데 사용했다. 그렇기에 무성히 자라버린 오늘날 마을의 입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장된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나무 사이로 사람이 지나다니던 흔적이 남아있는 조그마한 입구가 보였다. 외지인의 입장으로 다시금 마을에 발을 들인다는 게 조심스러웠기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터를 구분하던 돌담의 모습.
집터를 구분하던 돌담의 모습.

 안쪽으로 들어서니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울창한 숲에 가려 마치 70년 전 그날로 돌아간 듯 서늘한 적막이 감돌았다. 이끼 낀 돌담이 한 마을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구불구불 이어졌고, 이내 중심부에 다다르자 집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10여 가구 50명 내외의 주민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던 이곳은 집과 마을을 연결하는 올레와 함께 아궁이를 올릴 수 있는 부엌, 깊게 파여있는 우물 터와 '통시'라 불리는 재래식 화장실의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타지에 비해 비교적 광활한 토지를 가져 주로 농사와 축산업을 통해 소박하게 생활을 영위하던 이들은 소개령이 내려지자 곧바로 인근 왕모루곶과 동산전, 새미 오름으로 뿔뿔이 흩어져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 다만, 시간이 촉박했던 나머지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주민들은 토벌대가 활동하지 않는 저녁 시간에 불에 타 없어진 마을로 내려와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불안한 나날을 견뎌내야만 했다.

4.3사건 당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
4.3사건 당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

 깨진 항아리와 술병이 고스란히 돌담에 기대 누워 있는 이 공간은 주민 한달천씨가 거주하던 집터다. 한치홍, 한치명, 한달천씨 등 한 씨 집성촌이었던 이곳은 당시 급박했던 상황 탓에 주민들이 사용하던 민구류가 한편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기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모습이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생활 도구는 우리의 일상을 기억이라도 하라는 듯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마을 초입에서 반려견과 함께 쉬고 있던 A씨(47, 남)를 만났다. "주변에 사람이 없고 조용해 반려견을 데리고 종종 산책하러 온다"는 그는 이곳이 4.3사건 당시 소개된 마을인 것을 알고 있었냐는 질문에 "표지석을 통해 알게 됐다"며 "예전에 마을이었던 것만 알지 지금까지도 흔적이 남아있는 중요한 유산인지는 몰랐다"고 답했다. 이어 “역사가 기록된 장소인 만큼 정부 차원에서 보존에 신경 써주면 좋겠다”며 아무런 안내문 없이 방치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마지막 희망에서 발생한 비극,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공사가 진행 중인 다랑쉬 마을 표석 앞 모습.
공사가 진행 중인 다랑쉬 마을 표석 앞 모습.

 중산간 도로에서 내려와 석재를 싣고 뽀얀 먼지를 내며 달리는 트럭을 따라가다 보면, 공사 현장 한 가운데서 휑한 비석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외롭게 서 있는 이 비석은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를 알리는 표석이다. 오름의 여왕이라고도 알려진 다랑쉬 오름 곁에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지나가는 차량이 자주 보이나, 잃어버린 마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대부분 무심히 지나치는 모습을 보였다.

 해발 170m의 중산간에 자리하고 있는 다랑쉬 마을은 1948년 11월경 내려진 소개령에 따라 토벌대에 의해 전소된 장소다. 10여 가구 약 40명의 주민이 밭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며 소박하게 살던 이 마을은 다행히 4.3사건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비극은 가까이 위치한 다랑쉬 굴에서 일어났다.

다랑쉬 굴 일대의 모습.
다랑쉬 굴 일대의 모습.

 표석 반대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10분가량 걸었을 때, 멀리 굴의 존재를 알리는 깃발이 보였다. 이내 움푹한 반구 형태의 대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위령탑과 함께 다랑쉬 굴이 나타났다. 천연용암동굴인 이곳은 1948년 12월 18일 군경민 합동 토벌대가 피난와 생활하던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 11명을 학살한 비극의 장소다. 토벌대는 굴속으로 숨어든 피란민에게 밖으로 나올 것을 종용 했으나, 사살당할 것을 짐작한 주민들은 요구에 응하지 않고 계속 굴속에 머물렀다. 이내 토벌대는 수류탄을 던지고 입구에 불을 질러 피란민 전부를 질식사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굴 내부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가마솥과 주전자, 나무 주걱 등 조리도구를 가져와 사용했으며 옷감과 고무신 등 의복 또한 그들과 함께 발견됐다. 발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여자와 어린아이의 시신이 다수 존재했으며, 연기가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돌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고 숨져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다랑쉬 굴은 4.3사건 전반에 걸쳐 죄 없는 민간인이 무수하게, 그리고 잔학하게 학살 당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로 남아있다.

콘크리트로 인해 막힌 다랑쉬 굴 입구.
콘크리트로 인해 막힌 다랑쉬 굴 입구.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4.3연구소'에 의해 발견된 다랑쉬 굴은 더 이상 출입이 불가하도록 굳게 닫혀있다. 첫 조사가 이뤄진 1992년 4월 당국이 유해 발굴로 인한 파장을 방지하기 위해 재빨리 시신을 수습해 화장했고, 참상이 알려진 지 45일 만에 콘크리트로 입구를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탓에 이곳을 찾은 탐방객들이 참상이 발생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다랑쉬 굴은 다크 투어리즘 코스 중 하나로 지정돼 종종 찾아오는 탐방객이 보였다. 위령탑 앞에서 묵념을 마친 등산복 차림의 B씨(32세, 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다크 투어리즘이란 것을 알고 난 후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코스를 따라 여행하고 있다”며 “한 달살이로 제주에 내려와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 곳씩 가보고 있다”고 말했다. 굴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는 그녀는 “얼마나 처절한 심정으로 이곳에 들어가 숨을 생각을 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며 참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재 남아있는 잃어버린 마을은 대부분 농경지로 개작되거나 건물이 들어서며 비석만 덩그러니 남겨진 상황이다. 70년 전 유적이 그대로 현장에 남아있는 종남 마을은 아무런 안내도, 보존 조치도 없이 방치되고 있으며 다랑쉬 마을 또한 석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채석장으로 개발돼 비석 바로 앞 도로까지 공사가 한창인 실정이다.

 기억해야 할 공간이 사라지면, 우리는 자연스레 사실을 잊기 마련이다. 4.3사건이 발생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달해야 할 책무는 누구에게 남겨진 것일까? <최성진 / 2022 신문제작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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