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한 도로 옆 작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즐비하던 차들은 사라지고 조용한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한 10여 분을 걸었나. 멀리서 강아지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높은 돌담으로 감싸져 있지만 그 소리는 막을 수 없나 보다. 입구에 들어서자 넓은 마당과 초록색 펜스로 지어진 견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

기자는 몇 개월 전 SNS를 통해 ‘행복이네’를 알게 됐다. 다른 보호소들과는 달리 봉사자들까지 합세해 ‘호소문’ 비슷한 글을 올리던 행복이네. 그들은 무슨 영문으로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호소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기자는 사설 유기견 보호소가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알기 위해 지난 3월부터 매주 하루 ‘행복이네’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참여방법이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방법은 꽤나 간단했다. SNS를 통해 봉사활동을 가고 싶다는 연락을 남기면 된다. 그렇게 나의 첫 유기견 봉사활동이 시작됐다.

곱슬거리는 털이 인상적인 '쭈쭈'
곱슬거리는 털이 인상적인 '쭈쭈'

◇ “어쩐 일로 오셨어요?”

어떻게 왔냐며 환하게 물으시는 소장님의 말에 쭈뼛 거리며 ‘개인 봉사자요’하고 대답했다. 낯선 환경을 적응하고자 주위를 먼저 둘러봤고, 어딜 보든 내 시선이 닿는 곳엔 강아지들이 있었다. 제일 처음 이름을 외운 건 곱슬거리는 털이 인상적이었던 ‘쭈쭈’였다. 곱슬곱슬한 털이 갈색빛과 잘 어울리는 강아지였다. 쭈쭈와의 인사를 마치고 방진복으로 갈아입었다. 방진복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봉사자들이 다녀갔는지 짐작게 해줬다.

방진복을 갈아입고 이동한 곳은 가운데 견사였다. 큰 철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제법 큰 몸집을 가진 강아지들이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며 짖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크고 우렁찬 소리의 사뭇 긴장되기 시작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 하나씩 들면 돼요.”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강아지들의 용변을 치우고, 물과 사료를 채워주면 된다. 견사에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들.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순한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자꾸만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잠시만”을 반복하며 이곳저곳에 있는 용변을 치워 나갔다. 처음 맡는 냄새에 코가 시큰했다. 간단할 줄 알았던 생각과는 달리 청소를 하다 보니 어느새 등은 땀으로 가득했다.

가운데 견사 속 유기견들의 모습
가운데 견사 속 유기견들의 모습

그렇게 하루 이틀 봉사를 가다 보니 어느덧 코를 찌르던 냄새는 익숙한 냄새로 변해있었다. 봉사를 갈 때 최대한 시원하고 가볍게 입어야 한다는 노하우도 생겼다. 갈 때 마다 봉사자들의 수는 달랐고, 그럴 때 마다 추가적으로 하는 일 역시 달랐다. 봉사자가 많은 날이면 일찍 청소를 끝내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오랫동안 가질 수 있었다. 풀밭에 앉아 뛰놀고 있는 강아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견사 안에서 볼 때와 달리 더 빛나고 예뻐 보였다.

처음 봉사활동을 간 날, 실내로 들어가자 다른 강아지들과는 달리 차분한 모습을 하고 있던 ‘애랑이’가 눈에 띄었다. 전혀 움직임이 없던 애랑이는 가끔씩 문 앞을 서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봉사를 간 어느 날엔가 애랑이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장님은 날 좋을 때 애랑이 바깥공기를 맞게 해주어야 한다며 애랑이를 안고 밖으로 나섰다. 풀 냄새를 맡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던 애랑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따뜻한 햇살이 애랑이는 얼마나 그리웠을까. 애랑이는 당뇨로 백내장이 온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고, 병원에서 안락사를 시키겠다고 한 걸 소장님께서 반대해서 겨우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 예전에는 바깥이 무서워 잘 걷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잘 걸어 다닌다며 환하게 웃으시는 소장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애들 만져주고 놀아주는 게 가장 큰 봉사야.” 어쩌면 많은 봉사자들은 견사 청소가 주된 봉사의 일부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장님께서 진심으로 원했던 봉사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소장님의 진심이 느껴졌다. 철장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고 만져주면 어떤 강아지들은 더 만져달라는 듯이 몸을 돌려 아예 문으로 가져다 댄다. “소장님 저 강아지 이름은 뭐예요?” 차근차근 이름을 외워나갔다. 동동이, 구름이, 보람이, 유자, 유비 …. 한 마리씩 이름을 물어갈 때면 소장님께서는 각각의 강아지들마다 어디서 데려왔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 설명해 주셨다.

아이들을 만져주고 있는 고길자 소장님
아이들을 만져주고 있는 고길자 소장님

◇ “쟤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워져”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소장님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작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소장님의 첫 마디는 항상 한숨으로 시작됐다. 그 한숨에서 그간 소장님께서 감당하셔야 했을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소장님께서 이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아직도 내가 그날은 정확하게 기억해”라며 22년 전 12월 31일을 회상했다.

소장님은 눈보라가 치던 아주 추운 겨울, 친구들과 절에 올라가던 중 이빨도 채 나지 않은 새끼 강아지를 발견했다.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계속해서 무는 강아지를 보며 ‘얘는 내가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와 강아지들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해에 해수욕장에서 장사를 하던 그는 해수욕장에 버려져 홀로 있는 강아지들을 한두 마리씩 데려왔다고 한다. 한두 마리로 시작됐던 강아지들이 점점 숫자가 늘어 아파트에서 지낼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주택으로 이사를 간 그는 그곳에서 38마리의 강아지들과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주변 사람들의 원성에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그는 그곳에서 천막 밑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정식적인 ‘행복이네’ 보호소 운영이 시작된 것이다. 보호소 운영을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지만 실제 후원이 들어오고 봉사자가 찾아온 것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전인 몇 십 년 동안은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 온 것이다. 병원비, 입양비, 사료비 등 ….

봉사가 끝이 난 후 소장님과 함께 찍은 사진
봉사가 끝이 난 후 소장님과 함께 찍은 사진

◇ “혼자 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어”

그는 벌써 올해로 65세다. 160마리가 넘는 유기견을 홀로 보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 단체에서 운영하는 지자체 보호소와는 달리 사설 보호소의 경우에는 모든 것을 후원금이나 개인 사비로 운영한다. 그 오랜 세월을 홀로 감당해야 했을 그의 노력들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몸을 살피기도 전에 항상 아이들을 먼저 생각했다. 병원을 가보시라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아직 병원에 못 보낸 아이들이 너무 많다”라며 그저 강아지들을 걱정할 뿐이었다. 이렇듯 헌신적인 사랑에 오히려 봉사자들이 나서서 글을 올리고 그를 만류했던 것이다. 그는 “그냥 나중에 나 갈 때 쟤네도 같이 갈까 해. 내가 없으면 저 아이들을 누가 돌봐주겠어. 불쌍한 우리 애들”이라며 아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설 유기견 보호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또한, 그 책임의 무게가 얼마나 막중한지도 잘 알지 못한다. 사설 보호소의 경우에는 위에서 언급했듯 유기견을 끝까지 책임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저 떠돌이 유기견이 불쌍해서 제보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책임과 이어지는 행동들인 것이다. 행복이네 봉사자들과 그는 입 모아 말한다. 제보자 역시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제보의 무게를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이다. 끝으로 그는 “유기 동물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2021신문제작실습 / 김보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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