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책을 사랑하셨다. 낡고 협소한 집 한 켠을 떡하니 차지한 커다란 책장 3개가 이를 방증한다. 어린 나에게 그 책장은 사다리 타듯 오르는 정복의 대상이었고, 수십 권의 책 중 만화책을 찾는 - 별 소득은 없었으나 -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서재는 낡고 정 들은 것이었다. 어머니의 책장은 이상 문학상 작품집이 1980년부터 빼곡하게 정돈되어 있다. 국내 문학을 즐겨 읽으셨지만 막심 고리키나 모파상의 작품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버지는 주로 종교서적을 읽으셨다. 그 중 칼빈의 성경주석 전집이 가장 눈에 띈다. 이렇게 책을 늘 가까이하시던 두 분이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책장의 시간은 멈추어 버렸다.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탄 줘잉 편저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탄 줘잉 편저 

“책장의 시간은 멈추어 버렸다”

 부모님의 시간은 글 한 줄 읽을 여유도 없는 빠듯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서점에 가는 모습을 본 지도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장 속에서 비교적 최근 책이 몇 권 발견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부모님의 간절한 진심이었으리라.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는 그런 책 중 하나였다. 낡은 책 가운데 눈에 띄게 표지가 빳빳했던 이 책을 처음 접한 날, 나는 한동안 책을 안고 있었다. 책에는 가족과의 사랑, 인생의 가치를 보여주는 49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담겨있는 감동은 소중하다. 이 책을 지금 다시 선정한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책이기도 하며, 부모님의 진심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아들의 소망을 아낌없이 들어주면서 포기해야 했던 나머지. 그런 그들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한 가지. 혹자는 독서란 산소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부모님이 포기했던 그 나머지를 찾기를 바랐다. 이제는 숨 좀 쉬고 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를 시작으로 가족독서 릴레이를 시작했다.

 


 

“2008. 07. 무지 더운 날 무지하게 힘든 나날들… 홍군의 선물입니다.”

 책 속표지에 날짜와 함께 어머니가 적으신 글이다. 어머니의 귀여운 습관인데, 사실 이 책은 어머니와 오랫동안 친분을 지켜온 대학 선배의 선물이다. 그 더운 여름 왜 이 책을 어머니께 선물하셨는지  어머니의 감상평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메모

 “감사합니다. 그 고난과 고통 중에 이 글이 내 눈에 어찌  그리도 달콤했는지요. 아직은 살아있음에, 조금 더 버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 여름은 유독 집에 일이 많고 고된 해였다. 그런 상황에도 나에게 불안감과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부모님의 책임감 덕분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굳세게 자리를 지켜온 어머니일지라도 마음속엔 폭풍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풍을 잠시나마 잠재워주었던 이 책에 나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아버지는 49개의 이야기 중 딱 하나를 꼽으셨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기” 아버지는 평소 잔소리를 하지 않으신다. 성적표를 가지고 꾸짖으시거나, 놀러 나간다고 잔소리하신 일도 없었다. 그저 “조심히 다녀와라”라는 말로 당신의 관심을 표하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틈만 나면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다. 배움에는 때가 있으니,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책의 내용은 배움을 끝내고 하산하려는 제자에게 스승이 그릇에 돌과 자갈, 모래를 부으며 배움의 끝이 없음을 가르치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한줄평과는 조금 다른 주제 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그렇게 이 말씀을 강조하고 싶으셨어요?”

“때를 놓치면 남는 건 후회뿐이다. 아들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아버지의 애정표현 방식은 소심한 반복이다.

 

"서로의 발을 만지는 관계"

 셋뿐인 우리 가족에서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이 책에서 나의 가슴에 콕 박혀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부모님 발 닦아 드리기”이다. 누군가의 발을 만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민망한 일이다. 손은 하루에도 몇 차례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잡고, 표현한다. 반면에 발은 신발과 양말로 꽁꽁 숨겨져있다. 감히 누가 만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기에 ‘발은 만지는 관계’는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뜻한다. 우리 집은 밤이 되면 잠들기 전 거실에 모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발을 마사지해주고 나도 가끔 거들곤 한다. 하루는 부모님의 발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딱딱하고 뚱뚱한 아버지의 발, 마르고 비틀어진 어머니의 발. 매일 보는 얼굴에서도 알아보지 못했던 두 분의 노력이 거기 그대로 남아있었다.  문득 매끄러운 나의 발이 송구스러웠다. 내 몸과 마음을 지카기 위해 두 사람은 기꺼이 많은 시간을 희생해왔다.

그렇기에  부모의 또다른 이름은 희생 이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독서 릴레이는 끝이 났다.  나는 부모님께 짐을 조금 내려놓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것은 시간을 버텨낸 부모님의 강인함이었다.  그들의 이야기 앞에서 쉽사리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만이자 기만이었다.  동시에  지금 내가 전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 당장 내가 지금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감사와 사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2020 출판문화실습 / 언론홍보학과 4학년 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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