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9살에 이미 1인출판사를 경영했다. 이름은 ‘녹차출판사’. 창간호에 이것저것 기사도 썼고, 엄마가 다니던 회사랑 제휴를 맺었다는 광고까지 야무지게 그렸다. 아무도 봐주지 않았지만 나는 아주 진지했다. 그렇게 빈 스케치북을 글과 그림으로 채워가며 무엇인가를 막 썼고, 창간호가 완성될 땐 엄마에게 자랑도 했다.
창대했던 1호를 끝으로 녹차출판사는 폐간했다. (그 때도 출판시장은 불황이었다.) 그리고 폐간된 지 20년도 넘은 지금, 그 출판사가 어떤 책을 출판했는지 지금의 나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하나 기억나는 건 당시 9살 신인편집장의 업무가 매우 열정적이었다는 것. 생각하면 참 신기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나는 왜 알아서 출판사를 차리고 들뜬 얼굴로 무엇인가를 막 썼을까? 나의 어린 추억들은 <편집자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만 처음부터 상기됐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호기심이었다. 당시 나는 출판사가 궁금했다. 그 와중에 과제 겸 들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딱 마주쳤고, 바로 뽑아 대여했다. 한 번 읽고 나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내용이 아주 만족스러웠다는 것이었다.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출판사의 업무를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다. 내용 역시 저자가 직접 깨달은 경험들로 밀도 있게 채워졌다.
이 책에 따르면 책은 참 긴 호흡을 갖고 만든다. 책의 저자를 섭외하는 시작부터 내용을 구성하고, 검토하고, 교열에서 마케팅까지. 저자는 그 장대한 과정을 지치지 않고 하나씩 가르쳐준다. ‘좋은 제목과 나쁜 제목’, ‘저자를 섭외하는 법’, ‘왜 좋은 책에는 좋은 마케팅이 중요한가?’ 등등… 이런 전문적인 얘기를 일반적이면서도 흥미롭게 이끌어나가는 편집자의 내공을 느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 편집자, 출판마케팅을 지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읽을 것을 강력 추천한다. 이 책에 나온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정말 좋은 편집자가 될 것이다.
다른 직무의 사람들도 이 책에 나온 것을 실천하며 각자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느 분야던지 일의 속성은 같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하고, 타인의 일과 조절하는 것, 매뉴얼을 만들고, 보고하고 기획하는 것. 대상은 달라도 일의 핵심은 어느 분야에서나 같다. 특히 책은 기본적인 제조업 중 하나인데, 여기서 나온 과정들과 팁은 결코 특수하지 않다. 예를 들어, 저자에게 다가가는 법은 그대로 직장 내외의 여러 대상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책 기획의 기준을 보면 기획하는 업무의 기준을 볼 수 있으며 매력적인 카피를 쓰는 법과 마케팅 하는 방법 역시 이 책에 나온다. 이렇게 뛰어난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전체를 조망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좋은 업무 서적 읽었다.’ 이렇게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려는 순간, 갑자기 9살 추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 저자의 감정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출판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은 출판만이 나의 구원이라는 등 흔히 자기계발서에서 할 법한 느끼한 소리는 일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담담히 말하는 그 속에는 책에 대한 사랑이 어쩔 수 없이 묻어나왔다. 그런 마음이 내게 와서 어린 날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었다.
맞다. 출판은 기쁨이다. 저자는 분명 이 책을 쓸 때 기뻐했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 애정을 이 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공유했다. 사실 이 편집자가 느끼는 기쁨은 이전의 책을 만든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일 것이다. 자신이 출판한 책들의 반응들을 볼 때 그 짜릿함. 사람을 깨우는 영감을 담고야 말겠다는 열정은 수많은 문인들과 세상의 종이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9살의 나는 스케치북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 기쁨은 편집자, 작가들만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책과는 무관한 인터넷 시대라지만,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 출판인이 되었다. 이번 학기만 해도 대학생들은 리포트와 PPT를 작성하고, SNS에 자신의 생각이나 유머 글을 쉴 새 없이 쓰니 말이다. 요즘 e출판이 얘기되는 시점에 이런 사소하고 작은 글 역시 출판이다.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조별과제 PPT를 괴로운 마음으로 꾸역꾸역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더 좋게 만들고 싶어서 박스위치를 이리저리 옮긴 적이 있다든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글 혹은 결과물을 보여준 후 ‘오 잘 썼다’ 이 칭찬 한마디가 당신을 종일 춤추게 만들었던 적이.
나는 확신한다. 당신이 J.K.롤링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작성하며 당신만의 고양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이상하지만 인간이라면 가지는 욕구 중 하나니깐. 만약 당신이 나처럼 그 희열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이 말하는 기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2017 출판문화론/ 강민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