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늘 혼자였다. 나이차이가 꽤 나는 나의 언니, 오빠는 학교가 끝나도 곧장 학원 이곳저곳을 전전하기 바빴다. 부모님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우리 형제를 위해 맞벌이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집안 구석구석에 어둠이 가라앉을 때까지 홀로 빈집을 지켰다. 거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환한 아날로그 텔레비전 속 만화영화 한 장면과 어둠이 짓게 깔린 현관을 번갈아보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을 고대했다. 그것을 한참 반복하다 예상했던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으면 엄마의 012로 시작하는 무선호출기로 전화를 걸어 언제 오느냐며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러면 나의 엄마는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에 작은 액정 속 집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제일 먼저 집에 홀로 있는 막내딸을 생각했을 것이다.

  나이가 한 둘씩 먹어 가며 나는 이제 엄마를 찾지 않는다.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기 위해 사업으로 뛰어든 엄마에게 나는 빚쟁이가 되었다. 집에서 불과 10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서 숙박업을 하며 지내는 엄마에게 찾아 갈 때는 항상 이유가 붙었다. 상환 없는 용돈과 공짜 밥이 그 이유였으리라. 그래서 엄마는 그런 나에게 ‘빚쟁이’, ‘날강도’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가게에서 내가 밥을 먹고 있는 동안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담아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한다. 혹여나 내가 밥을 다 먹고 난 뒤에 빨리 자리를 떠버릴까 하는 조바심에 음식 이것저것을 더 늘어놓으며 이야기를 잇는다. 난 짧은 식사를 마치고 여덟 살 때 나의 모습을 한 엄마를 뒤로한 채 현관문을 나선다.

  아빠는 정년퇴직을 하고서도 아직 집에 남아있는 자식들을 위해 ‘정규직’에서 ‘알바’가 되어 온종일 일을 한다. 언니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밤늦도록 야간자습을 감독하고, 오빠는 언니의 뒤를 잇기 위해 노량진에 위치한 열 평 남짓한 방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각자의 삶에 바빠 서로를 돌볼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그런 중에도 엄마는 언제든지 우리 가족이 와서 먹을 수 있도록 매일 5인분의 밥을 짓는다. 다음날이 되면 밥솥에서 밥알이 그대로 다 말라비틀어질 지라도.

  다섯 식구가 모여앉아 다 같이 밥을 먹었던 날이 언제였을까? 그런 우리를 다시 잇게 해준 것은 학교에서 받아온 ‘가족독서릴레이’라는 과제였다. 시작도 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서로의 얼굴을 볼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삶에 갇혀 사는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것은 둘째 치고 어떤 책을 읽을까 하는 것도 골치였다. 집에 놓인 책장 앞에 가만히 앉아 한참을 들여다봤다. 삼형제의 대학전공 서적들과 수두룩한 소설책들 가운데 눈에 띄던 책은 아빠가 언니의 고3시절에 선물했던 <나나 너나 할 수 있다>라는 자기개발서적이었다. 지금 나의 엄마, 아빠는 환갑의 기로에서 새로운 인생의 서막을 열었다. 일찍이 교직 생활을 시작했던 언니는 새로운 도전에 갈증을 느꼈고 오빠와 나는 사회로의 첫발을 딛기 직전 출발지점에 서있다. 이 책이 우리 가족의 도움닫기 달림길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한평생을 대가없이 자식에게 바친 부모님에게 이젠 당신을 위해 살아보기를 권하고 싶었다.

  대뜸 학교 과제라며 책을 내민 나의 행동에 가족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는 가족들이라 큰 거부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아빠를 시작으로 엄마, 언니를 거쳐 노량진에 있는 오빠에게 택배로 다시 책을 돌려받으며 한 달간의 가족 독서릴레이는 마무리되었다. 한 달 동안 얼굴보기 힘들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던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큰 변화는 서로의 공통 관심사가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책을 읽고 서로의 꿈과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엄마는 이제 나에게 일방향적인 대화를 쏟아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요즘 엄마와 대화를 하기 위해 가게에 간다.

  삼형제의 학창시절 시험기간에 다함께 공부가 싫다며 투정부릴 때면 아빠는 항상 “나는 너희처럼 실컷 공부만 해보고 싶다!”했었다. 항상 배움에 목이 말랐던 아빠는 요즘 영어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특별한 공지사항이 없으면 울리지 않던 가족 카톡방에 돋보기안경을 쓴 채 한자 한자 꾹꾹 눌러 보냈을 아빠의 메시지가 뜬다. ‘How are you today?’ 바쁜 생활에 시간이 없다며 자신의 꿈을 접어두었던 엄마는 노트북을 장만해 밤을 새워가며 글을 썼다. 그리고 최근 ‘수필가’로 등단했다. 새로운 도전을 꿈꾸기만 하던 언니도 박사학위를 따겠노라며 교원대 대학원에 서류를 넣었고, 임용고시에서 두 번의 고배를 마셨던 오빠도 활활 타오르는 의지를 내비췄다. 250페이지 남짓한 책 한권이 우리 가족의 도전을 실현시키는 발화점이 되었다.

  <나나 너나 할 수 있다>는 미스코리아 금나나의 하버드 합격까지의 인생이 담겨있다. 여느 다를 것 없는 성공 수기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삶에서 닮고 싶은 점은 자신의 꿈을 향해 전력질주하면서도 언제나 가족을 잊지 않았던 부분이다.

  “엄마 아빠 두 분의 만남은 내겐 우주 탄생과 같았다. 행성과 행성이 부딪혀 하나의 우주를 잉태했고, 두 분은 새로 태어나는 생명의 심장 안에 그 우주를 깊숙이 심으셨다.”

  그녀의 에너지 근원은 가족에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 했고 또 실망시키지 않으려 애썼다. 어떤 선택의 순간이 닥쳐도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자기중심이 그녀를 어떤 위기와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게 했다.

  우리 가족은 도전을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심이 되어 바람이 심한 날에도 함께 버틸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2016 출판문화론 / 송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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