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중학생 시절부터 ‘노는 애’라는 딱지를 달았다. 학교 선생님들은 나를 항상 주시했고, 친구들은 나를 무서워했다. 사춘기를 크게 겪으면서도 나의 손을 절대 놓지 않은 부모님 덕에 ‘나 같은 애’는 갈 수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도 했다. 공부를 꽤 하던 친구들을 모아놓은 곳이라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아침 조회시간에 선생님께서 핸드폰을 내라하시면 다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교탁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우리 반 전체 학생 수는 40명이었는데 핸드폰은 항상 서른아홉 개만 수거되었다. 수거되지 않은 한 개의 핸드폰은 나의 것이었다. 수업시간이면 다들 선생님 입에서 나오는 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연필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가끔 조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몇 분 채 되지 않아서 스스로 교실 맨 뒤에 세워진 ‘스탠딩 책상’으로 가 서서 수업을 받았다. 그런 중에 쉬는 시간이 언제였는지도 모른 채로 점심시간까지 내리 자기 바쁜 내가 있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나니 나에겐 학교의 의미가 사라졌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가 할 때, 가족들에게 자퇴하겠다는 선언을 하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혈혈단신으로 집을 나와 친구 집을 전전하며 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세상의 모든 것에는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떳떳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 누구도 나를 꾸짖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난 그대로 집에서 한 달을 보냈다. 밤새 영화나 드라마 따위를 보고 해가 뜨면 잠을 잤다.

  그러다 어느 날 밤을 새워도 아침에 잠이 오지 않아 목욕탕에 가려 집을 나섰다. 내 또래정도로 보이는 교복 입은 여학생이 내 앞을 지나쳤다.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묵묵히 날 기다려주는 가족들의 얼굴이 눈앞에 북받쳐 올라왔다. 목욕바구니를 든 채로 길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난 그날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엄마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나를 깨워 밥을 먹이고 호주머니에서 꺼낸 꾸깃꾸깃한 지폐 몇 장을 쥐여 엉덩이를 두드리며 나를 학교에 보냈다.

  난 그렇게 부모님의 맹목적인 사랑을 깨달으며 차츰 사춘기딱지를 떼어냈다. 여느 학생들처럼 점심시간이면 친구들과 골인지점인 급식소를 향해 달리기 시합을 했고,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면 종례시간에 반장이 불러주는 답과 내 시험지를 맞춰보며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조금씩 적응을 하니 금방 고3이 되어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대학을 가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하루에 4시간씩만 자며 공부를 했다. 그런 나를 보며 놀라는 친구들에게 “서울대 갈 거야.”하며 너스레도 떨었다. 그런 나의 말장난은 곧 불화살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2010년 9월 수능이 코앞까지 다가온 달에 전교 1등이 서울대 수시에서 떨어졌다. 나의 엄마는 우리학교 학부모 회장이었는데 여름방학 때 교장선생님께 감귤 한 박스를 선물했었다. 그 감귤 박스는 친구들 사이에서 돈다발이 가득 든 박스로 소문이 났다. 나는 그렇게 교장선생님께 돈을 바쳐 전교 1등을 서울대에서 떨어지게 하고 그 자릴 가로챈 학생이 되었다. 터무니없던 소문은 금새 나를 ‘전교생의 왕따’로 전락시켰다. 내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퍼즐조각을 채워 놓기도 전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믿었던 친구들의 배신에 주먹을 꽉 쥐었다. 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인정해버리는 것 같아 이를 갈며 버텼다. 수능이 끝나던 날, 그날이 내 마지막 등교였다. 그 뒤로 난 학교에 가지 않았다. 졸업식 날에 바득바득 나를 차에 우겨넣고 학교까지 간 엄마의 정성이 무색하게 난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냉소를 지을 것 같았다. 난 나를 아주 작은 공간에 가둬 두었다. 그리고 자책했다. “난 처음부터 그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어.”, “내가 지금껏 해온 행실의 대가야.”, “난 이래도 싸다.”하며 아주 오랫동안 나를 탓했다. 대학생이 되어 단 한 번도 학과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남들 다가는 신입생 환영회도 MT도.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그마저 남아있던 중학교시절 친구들에게도 연락 한 번을 먼저 한 적이 없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아 할 게 공부뿐이었다. 방학 때 집으로 날아온 A와 A+가 가득한 성적표를 펼쳐보며 난 내 스스로가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언니는 매일 집에만 있는 나를 보며 “좀 나가 놀아.”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러면 나는 “귀찮아.”하고 말았다.

  어느 날 언니의 손에 이끌려 책방엘 갔다. 언니는 나를 ‘인간관계’, ‘심리학’에 관련된 책이 가득한 책꽂이 앞에 세워 놓고는 “그냥 책제목 보고 끌리는 거 골라.”했다. 연분홍색이 은은한 책표지에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라고 적힌 책에 시선이 닿았다. 수많은 책들 가운데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마음이 갔다. 책을 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첫 장만 한 시간 동안 읽었다.

  “두 번째 화살에 맞지 말라. 다른 사람이 준 상처에 죄책감과 분노를 얹어 더 큰 상처를 받지 말라.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엉뚱한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며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나는 참 오랜시간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을 내 탓으로 돌리며 죄책감을 느꼈다. 그게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저 한 구절에 내 자신에게 미안해져 읽고 또 읽으며 울었다.

  “때로 받은 상처가 너무 클 때는 ‘또 다른 나’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숨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상황에서 상처를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두려움과 절망의 늪에 빠져 버렸던 사람은 비슷한 상처 앞에서 똑같이 움츠러든다. … (중략) … 골방에 처박혀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 말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지난 시간을 위로 받았고 치유 받았다. 그리고 이 책은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무엇보다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어쩌면 상대방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올바르게 치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누군가를 미워하며 불행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하기를 권한다. 그것이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라는 것처럼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준 사람들의 잘못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하염없이 상대에게 저주를 내리고 복수를 그리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나의 분노가 다시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 시절에 날 배신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땐 자신이 너무 어려 올바른 판단이 서지 않았고 내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너무 늦어서 또 미안하다고. “그게 언제 적인데!” 하며 어수룩하지만 진심으로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다. 전쟁 같던 내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가끔씩 친구들이나 동생들이 자신이 상처받거나 마음 아픈 일을 당해 털어 놓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잠시 그 상황에서 한발자국 물러서서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책에 조금씩 손때가 묻어간다. 난 아직도 힘이 들 때면 이 책을 꺼내들어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나에게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바쁜 세상의 그늘 아래에 쉬어갈 수 있게 해주는 존재와도 같다.

  지금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상처도 받으면서. 또 그런 스스로를 다시 한 번 감싸 안아주며 아주 잘 지내고 있다. <2016 출판문화론 / 송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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