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무언가를 하기엔 늦은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 또래들은 모두 때에 맞춰 어딘가에 정착하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엄마와 언니도 나이에 대한 장난스러운 푸념이 늘어났다. 우연한 기회로 방문한 서점, 수많은 책들 사이를 지나치던 중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책의 뒤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게 있답니다"
할머니는 일흔이 넘는 나이에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데 나는 고작 24살 가지고 늦었다며 인생을 단정 지었다.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렇게 책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책을 사두고 점점 기억에서 잊혀갈 때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아, 나 책 읽어야 하는데. 그날로 책 읽기가 시작되었다.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는 책의 표현에 따르면 '지팡이 대신 캐리어를 끄는' 할머니가 쓴 에세이다. 저자 김원희는 전집 외판원, 정보화 교육 강사 등의 직업으로 활동했으며 70대에 작가가 되었다. 책에는 김원희 작가의 여행기뿐만 아니라 할머니로서 살아가는 이야기 또한 담겨있다.
"젊었을 때 안 되던 것이 나이 먹어서 되기도 하다니."
내가 가장 처음으로 밑줄을 친 부분이다. 정말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제들도 시간이 흘러가면 해결될까? 당연하게도 내가 나이가 들기 전까진 이 말이 진짜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에게 늙는다는 건 슬픔이 아니라 마법 같은 미래로 느껴질 텐데.
며칠 뒤 언니에게 책을 넘기면서 책을 읽는 방법을 설명했다.
"읽다가 인상 깊은 부분은 밑줄을 치고, 메모하고 싶은 거 있으면 적어두면 돼."
"밑줄은 치겠지만… 메모는 안 할래."
회사 일로 바쁜 언니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읽기만이라도 해주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뒤, 책이 돌아왔다. 언니가 말한 대로 책에 밑줄은 있었지만 메모는 없었다. 다만 언니는 책을 넘겨주며 한마디 했다.
"할머니가 스X크래프트를 하시더라? 신기하다."
언니는 한 줄 평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적어두었다. 우리는 나이라는 숫자 안에 자신을 가둔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본인이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다.
언니에게 책을 돌려받고 엄마에게 전달해 주러 가는 참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나 책 열심히 읽고 있어."
"응? 읽기로 한 책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데?"
"각자 고른 책 읽는 거 아니야?"
내가 엄마에게 오해하게끔 말을 했나 보다. 나는 서둘러 엄마가 읽고 있던 책을 빼앗고, 대신에 우리가 읽던 책을 손에 쥐여주었다. 빼앗은 책에는 꼼꼼히 메모가 되어있었다.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 독서 릴레이가 끝나면 새로운 독서 릴레이가 시작되겠구나…. 읽던 책을 멈추고 다른 책을 읽는 것에 엄마가 빨리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걱정과는 달리 엄마는 다섯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책을 돌려주었다.
엄마가 적은 한 줄 평은 '여행은 나이 들어서도 힐링이 된다'였다. 작년과 올해, 서울에 갈 일이 생기면 엄마도 같이 가곤 했다. 볼일을 보고 다음 날 제주로 돌아오는, 여행이라 보기도 어려운 짧은 일정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엄마에게서 은은한 기대감을 볼 수 있었다. 내년에는 엄마와 해외여행을 다녀와야지.
"80이 되어도 90이 되어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슴 설레고 슬픈 것을 보면 가슴 아프고, 좋은 글을 읽으면 감동합니다."
모두가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들도, 그리고 엄마와 언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곤 한다. 언젠가는 엄마도, 언니도, 나도, 우리 모두 할머니가 될 것이다. 할머니라고 달라질 게 뭐가 있나. 이왕 나이 드는 거 멋진 할머니가 되자. 지금처럼 게임과 초콜릿을 여전히 좋아하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갈 수 있는 데까지 여행도 가보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나이가 든다는 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기에. <2024 출판문화론 / 최예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