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독서 릴레이’라는 말을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 들어봤다. 짧은 이솝우화를 가족들과 돌려보는 방학숙제 이후에 경험이 없어 익숙하면서 생소한 프로젝트였다. 점점 바빠지는 일상에 책 중심은 커녕 간단한 일상 대화도 많이 줄었던 참이라 어쩌면 이번 프로젝트가 색다른 대화의 장을 열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시작하게 됐다.
오랜만에 마주한 독서 릴레이에 오랜만에 과거를 생각하며 추억에 젖었다. 처음 글을 배워서 아직 쓰고 말하는 게 서툴지만 끄적거리는 걸 참 좋아했다. 이런 나에게 부모님은 노란 개나리색 표지의 종합장을 선물해 주셨다. 내부는 점도 선도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백지로 이뤄졌고 나는 그 곳이 바로 내 무대 같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 종합장에 담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나는 짧은 시를 좋아했다. 종합장에 적은 모든 것들도 꾸불꾸불한 글씨체로 적힌 시로 가득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와 함께 들리는 구굴구굴 개구리 소리, 꽃이 활짝 핀 날이면 그 꽃 사이에 쏙 들어가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꽃잎 하나하나를 유치하게 담아뒀다. 타들어가는 장작을 보면서 타닥타닥 그 소리에 맞춰 운율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초등학생 나름의 감성이 담긴 글들이었다.
시를 다 쓰고 나면 꼭 부모님께 낭독해드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 하지 않는가. 칭찬에 더 힘입어 하루에 2개, 3개, 어떨 땐 5개도 썼었다. 노란 종합장을 가득 채우면 그 다음은 분홍, 그 다음은 빨강. 점점 나만의 시집을 만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시 쓰는 걸 멈췄지만 지금도 가끔 내 어릴 적 얘기를 하면 부모님은 “그 때 참 시 쓰는 거 좋아했는데.”하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나와 부모님을 연결해준 하나의 견고한 다리가 바로 ‘시’였다. 이번 독서 릴레이를 같이 하자고 말 꺼내기가 쑥스럽기도 하고 어색했는데 이 추억을 통해 그나마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집을 찾아보게 됐고 어린 시절 시로 쓸 얘깃거리를 찾았던 것처럼 제목에 걸맞게 갑자기 딱 눈에 들어오는 시집 「딱!」 을 만났다.
시집 「딱!」 은 시인 강상돈이 발표한 단시조 모읍집으로 총 5부로 구성되어 75편의 단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강상돈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출생으로 「딱!」 은 강 시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제주가 담겨있다. 강 시인은 시 속에서 달팽이, 담쟁이 등에 대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집요하게 다루는 습관을 드러낸다. 시를 읽으면서 '한가지 사물을 보고 이렇게까지 파고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제주의 시라면 오름과 4ㆍ3 이야기가 태반일 것 같지만 「딱!」 에는 직설적인 4ㆍ3 언급은 없고, 짐작할 만한 간접적인 표현만 몇 등장한다. 의식하지 않으면 숨겨진 배경을 모를 법한 단시조가 더러 있었다. 시집을 처음 접했을 때 다양하게 나의 상황에 맞춰 다양한 의미 부여를 했었다. 4ㆍ3과 상관없이 읽었을 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훨씬 다양한 의미를 전해줄 수 있다는 해설이 딱 와닿았다.
첫 번째 주자로 책을 읽으면서 가족들에게 보여줄 거라 생각하니 더 집중해서 읽으며 보여주고 싶은 부분은 내 마음과 함께 접어서 표시도 했다. 다음 주자로는 시 쓸 때 가장 응원을 많이 해주었던 아버지를 생각해서 책을 넘겼다. 금방 읽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책에 상황을 알아보니 한마디 적는 게 부담이 되어서 아직도 시작을 못했다고 하셨다. 아뿔싸. 매사에 완벽을 추구했던 아버지였고 오랜만에 보는 숙제였을 텐데, 그 부담감이 그제야 이해됐다. 그렇게 다음 주자는 셋째 언니, 지원언니가 이어 받게 됐다.
지원언니는 중학교 수학교사로 일하고 있다. 이과였던 학창시절부터 책이나 공부 등등으로는 나와 아예 취향이 달라서 처음으로 같은 책을 공유해봤기 때문에 어떤 글이 담겨서 돌아올까 더 기대도 됐다.
"한림은 4·3과 밀접한 동네라서 그런지 4·3과 관련된 (시인의 의도가 맞는지는 모르겠음) 시가 기억에 남음. 특히 「빗물」. 그들의 울음이 들리는 것 같고, 개인적인 일로 울고 싶을 때면 빗물 속에 울음을 뱉을 내 모습도 그려짐. ㅠㅠ"
먼저 시를 정확히 간파한 감상평에 ‘역시 언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공감의 멘트가 나의 마음을 한번 건드렸다. 최근 개인적인 일이 많았는데 감상평에서 그 부분이 투영된 것 같아 우리끼리 독서를 통해 감정적인 공유가 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다음 세번째 타자로 둘째 언니, 지윤언니가 책을 넘겨받았다. 언니에게는 내가 직접 과제를 전하지 못하고 지원언니에게 전달해달라 부탁했다.
"신발 1. 직관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더 깊이 읽으려면 그 것도 가능한 시. 신발 2와 분위기가 매우 달라 흥미롭다."
지윤언니와는 평소 수다를 많이 떨지도 감정 공유도 잘되던 편은 아니었다. 서로 틱틱거리고 무심하게 대하기 일쑤였는데 전해 받은 책에 금세 감상평을 다 쓰고 가지런히 방에 정리해둔 책을 보면서 묘한 사랑과 감동을 느끼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아버지에게 책이 돌아갔다. 아버지는 책을 받고 이내 며칠을 또 고민하시다가 정말 막바지에 책을 돌려주셨다. 좋은 한마디를 남기고 싶다던 아버지의 바람이 조금 해소가 됐을까. 남겨 주신 글에는 감상평을 넘어서서 그 글을 다시 볼 나에게 남기는 메시지 같았고 그 노력이 슬며시 보였다.
"겨울 감나무. 지나온 날들을 견뎌온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다가올 봄이 있음을 희망한다."
이번 독서 릴레이는 참 몽글몽글한 추억이 될 것 같다. 기대했던 것만큼 책에 대해서 우리가 더 얘기를 나누고 추억을 되살릴 기회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시’라는 우리의 연결고리를 이번에 다시 꺼내 글로 서로 소통할 수 있어 신선하고 재밌었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을 텐데 싫다는 소리 한 번 없이 잘 마무리 해준 가족들에게 마음 한 켠의 사랑도 느낄 수 있었다. 가족들에게도 책을 보던 그 시간만큼은 잠깐의 환기가 되던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이번 독서 릴레이 기간동안 서울에 있는 첫째 언니와 어머니에게는 이 책이 닿지 못해 아쉬움이 조금 남지만 이 아쉬움을 계기로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2024 출판문화론/신금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