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초반부는 매우 혼란스럽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뒤섞인 플롯과 문장에서 뿜어져 나온 문학적인 미사여구가 머릿 속을 혼란스럽게한다. 하지만 이 혼란 속에서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제주의 겨울에 대한 뚜렷한 묘사와 두 여성이 느끼는 고통이다. 특히 제주도의 겨울에 볼 수 있는 눈보라와 칼바람에 대한 뚜렷한 묘사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내가 직접 느꼈던 겨울의 기억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했다.
내가 경험한 제주의 겨울
고등학교 겨울방학때 나는 친구들과 한라산에 간 적이 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의 넘치는 에너지와 철없는 패기를 시험하기 위해 가장 날씨가 안 좋은 날을 골라 특출날 장비도 없이 두꺼운 옷과 음식 몇 개를 싸 들고 무작정 한라산 정상으로 향했다. 그날은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등산을 하는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몇 명 정도 있었을 수도 있지만 눈보라가 눈앞을 가려 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종아리까지 덮는 눈길을 밟으며 얼어서 감각이 희미해지는 손발의 느낌은 마치 이 책 속 주인공 경하가 인선의 집에 찾아갈 때 느꼈던 고통과 똑같았다. 정상에 이를수록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웠고 한라산의 경치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정상에 도착을 했을때 우리는 그곳이 정상인지도 몰랐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완만해졌기 때문에 어렴풋이 짐작만 했고 정상임을 확신하게 된 것은 정상임을 알리는 비석을 눈보라속에서 겨우 찾았을 떄였다.몇 미터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눈보라가 눈앞을 가리고 몸을 뒤흔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비석을 찾기 매우 힘들었다. 때문에 정상에 도착했음에도 정상을 정복했다는 후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책의 1부를 다 읽었을 때의 기분은 그때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과 유사했다. '내가 잘 읽은게 맞나?'라는 생각과 함께 분명 1부가 끝임을 알리는 172페이지에 도착했음에도 복잡한 내용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또한 이 책이 4.3사건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있어서 그런지 백페이지가 넘는 1부를 읽는 동안 4.3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은 것이 굉장히 의아했다.
1부를 읽으면 인선과 경하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묘사가 인상깊게 다가온다. 손가락 치료를 받으며 느끼는 인선의 고통과 추위와 어둠을 뚫고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경하의 고통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 읽는 이로 하여금 생생하게 느껴지게 한다. 솔직히 나는 이 고통을 묘사하는 부분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부분을 읽으면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7번방의 선물'이라는 영화에 남겼던 한줄평이 떠올랐다. "캐릭터 학대를 통해 얻어낸 눈물의 의미는 뭘까?" 이 한줄평은 작품 속 인물을 끝없이 학대하여 독자의 감정을 억지로 이끌어 내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도 인선과 경하를이토록 학대하여 얻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들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타인의 목소리
나는 2부를 읽기 시작했다. 2부는 다소 편안하게 읽혔다. 2부에서는 드디어 4.3사건에 대한 묘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묘사가 제주어로 쓰여 있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지만 눈으로 읽는 게 다소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그 부분을 작은 소리로 입술을 움직이며 소리 내며 읽었다. 사투리는 글로 쓰여 있는 것보다 소리로 듣는 게 훨씬 와닿았다.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묘사하는 부분을 소리 내 읽자 그들의 말투와 감정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져 마치 내 입에서 내 목소리가 아닌 그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4.3사건의 참혹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참혹함은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에 대한 묘사보다 그들이 느꼈던 감정과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무력감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더욱 크게 느껴졌다. 피범벅인된 모래사장과 그들의 시체에 대한 묘사는 이상하게도 덤덤하게 다가왔고 잡혀가기 전에 머리를 다듬어 조카를 보여주는 삼촌의 태도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전체적으로 2부는 술술 읽혀져 3부까지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고통에 익숙해진 상태
3부는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3부에서는 비로소 1부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웠던 이유와, 2부에서는 충격적인 장면보다 당사자들의 마음에서 4.3사건의 참혹함이 더욱 짙게 느껴졌던 이유, 인선이 경하에게 그렇게 궂은 날씨에 자신의 집에 가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한 이유를 전부 알게 해주었다. 작가는 4.3사건의 진실을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3부를 통해 알린다. "스스로가 변형된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간 상태" 즉 인선의 어머니와 인선이 도달한 '고통에 익숙해진 상태'가 되어야만 4.3사건의 숨겨졌던 진실, 참혹함 속에서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던 그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감각에 가려진 경우가 많다. 작품이 묘사하는 시각적,청각적,촉각적 감각에 대한 묘사에 지나치게 빠져들면 그 뒤에 숨겨진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놓치는 십상이다. 작가 한강은 4.3사건 속의 사람들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독자들을 감각적 묘사에 익숙해지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법은 잘 통한 듯 하다. 그 어려웠던 1부를 읽으며 내 머릿속이 너덜너덜해지고 인선과 경하가 느끼는 끔찍한 고통을 보며 정신이 피폐해진 나는 비로소 작가가 원했던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간 상태'가 된 것이다. 이 상태가 되니 4.3사건의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참혹함에 익숙해져 그들의 사랑을 비로소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나니 끔찍하고 비극적인 현실속에서도 인간의 '사랑'은 결코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4.3사건이라는 비극속에서도 사랑이라는 가치를 져버리지 않고 끝까지 간직하며 이 비극을 버텨냈다. 나도 이들처럼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남을 사랑하고 지킬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