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A
2년 전 6월. 동네 친구와 함께 집 근처 마트를 갔다. 맞은 편에서 느릿느릿 유모차를 몰고계시는 할머니를 만났다. 아이가 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분홍색 유모차에는 작은 말티즈 한 마리가 있었다. 강아지는 우리를 향해 털이 폭신폭신하게 자라있는 귀랑 꼬리를 흔들어댔다. 몸은 불편하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주인이 되시는 할머니께서 콩이와 같이 나오고 싶어 하신 듯해서 유모차에 태운 것 같았다.
나는 대뜸 할머니께 “애기가 너무 예뻐요”라며 넉살 좋게도 물어보았다. 나는 원래 아무에게나 말 붙이고 이런 사람이 아니다. 하얗고 작은 강아지들만 보면 누군가 생각이 나, 몸이 먼저 움직여진다. 혹시 둘만의 소중한 시간에 실례가 될까, 눈짓으로만 인사하던 우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줘도 돼요"라고 선뜻 말해주셨다. 나는 사랑받으려고 팔딱거리는 이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털들을 슬쩍 넘겨주었다.
작은 강아지는 우리를 보고 몸을 반쯤 내밀었다. 우리는 아이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유모차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나름의 질서가 있어 보였다. 콩이는 혀를 핥짝이고 콧등을 치켜세우면서 냄새를 맡으려고 애썼다. 그제서야 할머니께 여쭤보았다. “강아지 이름은 어떻게 돼요?”. 우리는 곧 그 아이가 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눈으로 잘 빚어놓은 듯한 하얗고 동그란 얼굴. 새까맣고 맑은 두 눈.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반지르르한 검정 코. 콩이의 모습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봐도 웃음이 절로 지어지게 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할머니와 콩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 우리 집 강아지도 하얗고 동글동글한데…. 그날은 유난히 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이었다.
그리고 기억 B
지난 해 12월. 나의 가족이자 나의 친구였던 우리 집 사랑스러운 막둥이 ‘구름이’를 무지개다리 건너편으로 떠나보냈다. 그 아이는 고작 열 살 먹은 철부지 막내였던 어린 나에게 새로 생긴 동생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빠의 차 안, 많이 어렸던 나는 그보다 더 작은 생명을 품에 안아보았다. 낯선 환경에 깨갱대는 구름이를 달래주고자 가슴께를 토닥이며 귀를 가까이 댔다. 쿵쿵-. 쿵쿵-. 심장박동은 소리를 타고 나에게 전해져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 아이는 한때 내 인사를 피하기 바빴던 이들을 대신해 한없이 나를 사랑해 준 친구였다. 별로 있고 싶지 않았던 학교를 벗어나 홀로 집에 돌아가더라도 세상 누구보다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나는 구름이의 집에 머리를 들이밀고 종알거리며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주절댔다. 별거 없는 이야기에도 구름이는 귀를 쫑긋 세워주었다. 어쩌면 귀찮다는 티를 낸 것일 수도 있다.
그 아이는 나보다 다섯 곱절은 더 시간을 빨리 달렸다. 시간에게 제발 천천히 가라고 부탁해도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구름이는 어느새 숨쉬기도 버거운 노인이 되었다. 다리 근육이 다 허물어져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밥도 삼키지 못해 잘게 다져서 죽처럼 만들어 떠먹였다. 눈만 겨우 깜빡이며 색색거리는 쉰 소리가 섞인 옅은 숨소리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결국 열다섯 해를 함께 맞이하지 못했다.
잔잔함을 장벽 삼아 애써 물 밑에 숨죽이고 잠겨있던 나의 작은 물방울들은 순간 회오리를 만들고선 쿵쿵 요동치고야 말았다. 그렇게 전이된 감정들은 가슴을 실컷 두들기고 지나갔다. 나는 듣지 못하는 구름이에게 바라는 점이 참 많다. 내가 지어준 그 이름과도 같이 푸르른 저 하늘을 유영하는 구름이 되기를 바란다. 다시 만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흐를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 다시 한번 꼬리를 흔들어 반겨주었으면 좋겠다.
구름이는 고요했던 그림자에 갑자기 빛 한 줄기 드리우듯, 어느날 나의 한 영역을 침범했다. 그런데 인생의 절반을 넘게 같이 지내다 보니 침범이라는 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단조롭게 흑백의 TV처럼 살아갈 뿐이었던 나를 다시금 환하게 조명해주었다. 분명 무지갯빛 구름이었을 것이다. <고재원/ 2022 저널리즘문장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