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통증사회'
요즘 우리 모두는 불편하다. 이번 추석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가족과 친척을 만나고, 선물을 나누고, 추석맞이 문자를 보내면서도 무엇인가 불편했다. 차마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불편함은 지난 4월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오지 못한 그 아이들과 추석을 함께하지 못한 부모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생긴 것이었으리라. 그래서였을까. 어느 아는 분의 "풍요보다는 궁핍이, 기쁨보다는 아픔이 같이하는 한가위" 라는 카톡 메시지가 이번 추석을 잘 말해주었다.
불편함에도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싫은 것, 귀찮은 것에 대한 신체의 즉각적인 반응이다. 다른 하나는 미안함에서 연유하는 심리적 반응이다. 그 미안함 때문에 좋은 일에도 마냥 기뻐할 수 없고, 순간 찾아오는 행복감을 누그러뜨리게 된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식농성 등에 동참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 불편함으로 대신했을 것이다. 이는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타인의 '아픔'에 대하여 그간 우리가 가져왔던 인지상정의 사회적 정서였다. 이번 추석은 그래서 더욱 불편하고 미안했다.
언제부터인지 꼭 집어 들추어낼 수는 없으나, 우리사회에서 '대의적 명분'에 대한 공감도가 떨어진지는 꽤 오래되었다. 정의나 민주 그리고 공익의 명분들이 아무런 울림을 갖지 못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대신 그 자리를 '진영논리'가 차지하고 있다. 자기편이 아니면, 자기편에 이익이 되지 않으면 어느 대의명분에도 공감하지 않는 냉랭한 세상이 되었다. 이 진영논리 앞에서는 정부와 정당은 물론 언론마저도 예외가 없다.
그런데 앞선 대의명분에 대한 공감 상실보다 더 크고 심각한 일들이 최근 들어 우리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상실이 바로 그것이다. 내 아픔이 아닌 타인의 아픔은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이것도 모자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조롱까지 하는 지경이 되었다. 한마디로 타인의 아픔에 대한 무감각, 무통증의 사회가 된 것이다.
더욱 위험한 것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성 상실을 경계하고 경고해야 할 정치지도자들과 언론들이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활성화'를 명분으로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 아픔을 거론하지 말자고 한다. 그 아픔을 빨리 잊어버리자고 강요한다.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져야 할 위치에 있는 높은 사람들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그것도 부족하여 일부 언론들은 아예 그 아파하는 사람들과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문제집단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진영논리에 의한 일종의 '차별화' 전략으로 가장 극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추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분위기가 단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게걸스럽게 먹는 퍼포먼스의 연출을 용납하게 하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은 곧 나의 아픔을 위한 이타적 공감 행위이다. 비슷한 생명체의 무리들끼리 모여 있으면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을 가리켜 '류적동질성(類的同質性)'이 주는 혜택이라고 한다. 외로울 때 위로해주고, 힘들 때 거들어주고, 아플 때 같이 아파해주는 것이 영장류 인간이 갖고 있는 류적동질성의 핵심이다. 그러함에도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타인의 아픔에 대하여 최소한의 미안함과 불편함도 갖지 않는 것, 이는 인간으로서의 류적동질성을 우리 스스로가 파괴하는 일이다. 인간성의 상실은 곧 '광기의 시대'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상실 즉 '무통증'의 인간을 양산하고 있는 듯한 지금의 우리사회가 진짜 두려운 이유이다.
*본 칼럼은 한라일보 월요논단(2014.9.15)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