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그렇다. 평소엔 볼 수 없었던 낯선 내 모습을 만나게 해주며 닫혀있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시시껄렁한 고민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익숙한 지루함에 외면하게 됐던 것들을 다시 그리워하게 만드는 놀라운 복원력이 생기는 것도 여행이기에 가능하다.

각자의 여행에는 자신만의 필수품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카메라가, 다른 누군가에겐 공책과 펜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것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자신만의 여행에 딱 맞는 찰떡궁합 짝꿍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한가?

여행과 책. 다르면서도 어울리는 듯 한 둘을 그런 짝꿍으로 소개해보고자 한다.

▲ 여행과 책

우연히 집어 든 책이 가본 적 없던 막연한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질 때 여행은 시작된다. 책은 여행길의 지표가 돼준다. 앞서 걸은 여행자들의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하고 그들과 다른 나만의 길을 기록해주기도 한다. 지루한 이동시간의 둘도 없는 동행자가 되어주는 책.

이렇게 여행과 책의 찰떡궁합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 찾는 작은 공간이 도시와 동떨어진 작은 동네에 들어섰다. 소소한 감성의 여행가들은 거창한 여행 지도서보단 소박한 여행 사진집을 선호하며, 화려한 도시 문명보단 정겨운 동네와 골목길을 사랑한다. 그런 여행가들의 취향이 녹아든 책을 판매하는 공간이 제주에 싹을 트기 시작한 것이다.

책방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만이 아니다. 책과 이야기와 사람이 만나 여행의 추억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책방 주인은 우리가 걷던 길 위에 작은 책방을 세웠다.

책방 ‘라바북스’ 가 위치한 곳은 제주도의 남쪽 동네인 ‘위미리’다. 제주도를 여러 번 다닌 여행자에게도 ‘위미리’는 낯선 동네일지 모른다. ‘위미리’는 서귀포시에서 표선이나 성산으로 가기 위해 한 번쯤 지나쳐 봤을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동네를 사이에 둔 ‘위미리’는 봄이면 벚꽃이 흩날리고 조금만 걸으면 푸른 바다가 맞아주는 한적한 동네이다.

요즘 제주의 서쪽과 동쪽 바다 동네는 여행을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너도나도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게스트하우스며 카페를 차리는 그 동네들과 달리 이곳, 남쪽 동네는 여전히 어릴 적 뛰놀던 그 동네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만이 특별한 여행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소할지라도 ‘보통과 구별되게 다른’이라는 뜻의 ‘특별’ 이란 말이 꼭 맞는 곳이 나만의 취향과 감성이 담긴 특별한 여행지가 된다.

▲ 투박한 건물 외관.

깊은 산골 허름한 오두막집엔 요정들이 산다. 그 요정들은 자기들만의 발랄함과 유쾌함으로 낡은 오두막을 꾸며 놓았다. 정겹게 꾸려나간 허름한 오두막집은 고요한 숲 속, 동물 친구들의 쉼터가 되었다. ‘라바북스’ 책방은 딱 이런 동화 같은 느낌이다.

책방이 들어선 건물은 이 작은 동네에 흔치 않은 3층 건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들어섰던 상가가 운영조차 안 하는 때 낀 건물일 뿐이다. 낡은 외벽 굳게 닫힌 검은 문 위로 간판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투박한 건물 외관으론 설마 이런 곳에 그런 책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책방을 한 번에 찾지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책방을 찾고자 하는 이도 헤매는 이곳을 그냥 지나가는 이들이 발견할리 만무하다.

허름한 건물에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외관과 달리 그 안은 아주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만의 여행을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오래도록 앉아 책을 보고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요정들의 오두막집처럼 홀로 걸어 때론 외로운 사람들에게 아늑한 '쉼' 을 내주고 있었다. 그게 너무나 예쁜 공간이었다.

▲ 라바북스.

오두막집의 요정들처럼 책방 주인이 직접 꾸며가는 이 공간에는 책방 주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칠하듯 하얀 벽 위에 엽서들과 포스터들로 색다른 그림을 그려나간다. 그윽한 귤꽃향기가 가득한 책방 한편에 귤 상자가 보였다. 귤 상자 안에는 주인이 보던 중고서적들이 담겨있었다.

▲ 책방을 직접 꾸미고 있는 책방주인.

이렇게 책방에 들이는 모든 책들은 책방 주인이 읽고 싶은 책, 읽어봐서 좋았던 책이다. 평소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 표지만으로 구매 욕구가 치솟는 책, 독특하고 강렬한 매력을 뿜는 독립출판물이 책방 안을 가득 채웠다. 책방에는 여행 사진집, 외국 잡지, 여행 에세이, 그림책, 제주 관련 도서 등 다양한 독립출판물과 일반 서적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 독특한 매력의 독립출판물들이다. 자신의 자리를 조용히 지키며 강렬한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 독립출판물, 임진아 작가의 ‘현명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그림일기를 보는 듯 했다.

이곳의 책들은 치열한 경쟁 끝에 책방 주인의 취향으로 선택된 것이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 곱게 정리된 아기자기한 소품들, 인테리어까지 책방 주인의 취향이 잔뜩 묻어나 있다. 주인의 취향이 그대로 묻어난 책방, 이것이 작은 책방만의 매력이 아닐까.

▲ '라바 북스' 책방 내부 모습.

책방 주인은 서울에서만 30년 넘게 생활한 대한민국의 평범한 30대 직장인이었다. 몇 년 전부터 필름 카메라의 매력에 빠졌고 소소한 여행을 통해 생활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지냈다. 여행이 일상의 한 방식이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으로 누가 추천하는 여행, 누가 알려주는 구석, 이런 것들 말고 오로지 ‘내 여행’을 원했다. 정갈하고 정돈된 그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 일본으로만 열 번 넘게 여행을 갔다. 그러던 중, 유명 사진작가들의 멋들어진 사진집이 아닌, 평범한 생활 사진가들의 눈으로 본 여행 사진에 꽂히게 되었다.

여행 사진을 보다 문득 여행을 기록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쓸모없어 보이는 인생을 쓸모 있게 만드는 법은 ‘기록’이다. 일상의 기록은 한 문장의 글이 될 수도 한 장의 사진이 될 수도 있다. 사진으로 여행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 현재 판매중인 '라바 5호 Lisbon'. 양 옆에는 품절된 1호부터 4호.

그래서 소규모 여행 사진집 ‘라바’를 기획했다. 프랑스어로 ‘그곳에’라는 의미의 ‘la-bas’. 막연한 ‘그곳에’ 대한 동경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사진집 발간을 시작했다. 당차게 시작한 독립출판이었지만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책방 주인은 프로젝트를 올리면 후원자들을 통해 후원을 받을 수 있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이용했다. 독립출판물 ‘라바’는 책방 주인이 혼자 만드는 사진집이면서 많은 사람과 함께한 사진집이었다.

느릿느릿하지만 여유 있게 세상에 나온 ‘라바’ 1호는 책방 주인이 직접 다녀온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가 주제이다. 이렇게 ‘라바’는 매 호마다 세계 여러 나라의 한 도시나 테마여행으로 꾸려진다. 2011년 11월 첫 호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현재 2호 Barnsley, 3호 Temples in Korea, 4호 Berlin, 5호 Lisbon까지 발간했다. 2호부터는 작가가 아닌 편집자로 참여했다. 사진집의 작가로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나 여행과 사진에 관심이 많은 생활 사진가들의 신청을 받았다.

▲ 라바 5호 Lisbon.

‘라바’는 사진에 따로 설명이나 코멘트는 들어가 있지 않고 오직 사진으로만 꾸며진다. 사진집 작업은 작가의 사진을 받아 편집과 디자인을 담당해주는 에디터 친구와 1차로 사진을 고른다. 그다음 작가와 만나 꼭 넣고 싶은 사진이 있는지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의논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책 뒷부분에는 추천 장소를 설명과 함께 넣고, 작가의 간단한 여행기로 채워진다. 책방 주인은 매 호마다 유명 작가가 아닌 여행을 사랑하고 사진을 사랑하는 생활 사진가의 참여를 원한다. 직접 가 볼 수는 없어도 ‘라바’를 통해 분위기와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 세계 여러 나라의 풍경을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한다. ‘라바’는 여행으로 만드는 책인 것이다.

‘라바’의 사진들을 넘겨보다 보면 여행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마치 어서 여행을 떠나라 속삭이는 듯 한 이 황홀한 착각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 된다. 이러한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을 권하는 곳. 그곳은 ‘라바북스’이다. <2015 신문제작실습 / 고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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