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씨앗도서관 김윤수 대표가 현수막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중에서 제주도 토종 작물로 만든 음식이 얼마나 되게?"

만찬을 앞에 두고 김윤수(47·애월읍 유수암) 대표가 내게 물었다. 보리콩을 넣은 잡곡밥, 알타리 무 김치, 녹두전, 호박죽, 양파 장아찌, 가지 무침, 반찬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두 테이블을 가득 채운 점심상을 사이에 두고 제주씨앗도서관 11월 행사가 열렸다.

지난 14일, 서귀포 한남리 복지회관에 모인 30여명의 제주씨앗도서관 회원들은 각자 만들어온 토종작물 요리 만찬으로 모임을 시작했다. 테이블을 두르고 서서 각자 만들어 온 음식 맛을 평가하고, 재배 과정을 얘기하니 어느새 모임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쌀은 육지에서 기르지 않았을까요?" 갑작스러운 김 씨에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지. 저것도 강정에서 기른 논벼야. 논농사가 되거든" 촌에서 자라 이번 취재에 나름 자신이 있던 내게는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그 밖에도 고추, 양파, 가지, 보리 등 제주 씨앗 도서관이 지난 4년간 기증해 온 씨앗들을 심어 수확한 작물들이 요리돼있었다. 매 모임마다 이뤄지는 점심 만찬은 회원들 간의 친목 도모뿐 만이 아니라, 제주씨앗도서관의 프로젝트 상황을 되짚어보는 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처음엔 이런 파티는 꿈도 못 꿨지. 집에 있는 반찬 중에 토종 종자로 만든 게 얼마나 있겠어? 근데 씨앗을 나눠주고, 그걸 사람들이 가져당 기르다보니, 이렇게 수확해그넹 요리해먹게 된 거지" 맛깔나게 생긴 반찬들을 뜨며 말하는 김씨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김씨는 지난 2012년부터 씨앗 기부를 해왔다. 제주 땅에 제주의 씨앗이 아닌 외래 종자들을 심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때부터 농가를 직접 돌아다니며 토종 종자를 찾았고, 주인들에게 씨앗을 얻었다. 상품성이 떨어져 팔 곳도 딱히 없는 씨앗을 수집하는 그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봤지만, 김씨는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꿋꿋하게 씨앗을 수집했다. "나는 ‘씨앗 찾기 여행’이라고 불러. 뭔가 '씨앗 원정대'같은 느낌이 들잖아" 고된 여정이었지만 그의 씨앗 여행은 점차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제주 땅에 농사를 지으려니, 그에 맞는 씨앗을 찾는 거지"

▲김중호 부대표가 회원들에게 토종 보리콩 종자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토종 씨앗을 찾느냐는 내 질문에 김 씨가 대답했다. "건강을 위해 가장 신경써야할게 뭔지 알아? 먹을 거라. 아무리 친환경이다. 무농약이다 해도, 결국엔 그 땅의 종자를 심근게 가장 몸에 맞는다는 걸 안거지. 개량종은 모든 땅의 영양분을 다 담아낼 만큼 개별화가 되어있지 않어."

그 날 모임에 온 사람들 중 절반은 본업이 있었다. 한의사부터 공무원, 대기업 직원, 방송국 작가까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농사란 부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이 외딴 동네 복지회관까지 모은 것이 '씨앗'이었다. 건강을 위해 재래종 종자를 얻고, 농사 노하우를 얻기 위해서 매번 모임마다 40명이 넘는 반 귀농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 만찬에 끼어들었다.

"밥맛이 좋아 주인한테 어떻게 길렀는지 물어봤어요. 산디(밭벼)가 아닌 제주 논벼는 처음 먹었네. 씨앗 얻어서 심으려 해도 내 땅에 논이 되질 않으니깐 아쉽긴 한데…" 쌀밥 앞에서 떠나지 않던 김주익(37·신도리) 씨가 내게 말했다. 이렇듯 씨앗도서관은 사람들에게 새로 찾은 토종 종자를 소개하고, 씨앗을 이어주고, 농사 노하우를 전달하는 장소였다.
 

"씨앗 받으민 심어보고 기르당, 다시 씨앗 열리민 돌려주고"

씨앗도서관에는 회원이 따로 없다. 모임에 참가하기만 하면 회원이 되는 것이다. 회칙도 회비도 없이 씨앗 공유를 위해 운영되는 네트워크다. 이름처럼 공공도서관의 운영방식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기존 도서관이 지식의 보관과 공유를 위해서 운영된다면, 제주씨앗도서관은 토종 종자의 보관과 공유를 위해 운영되고 있다.

"돈 받는게 아니라. 씨앗 받으민 심어보고 기르당. 다 커서 수확행 씨앗 생기민 받은 만큼 우리 돌려주면 돼. 그렇게 씨앗 양을 늘려 나가는게 우리 목표야" 올해에만 나눠준 씨앗의 종류가 80여 종이라고 한다. 봄 모임에서 종자를 나눠주고, 철마다 모임을 가져 제철 종자들을 추가로 더 나눠주고 있다. 하지만 도서관의 접근이 개방적이고, 활동 범위가 넓어지다 보니 뿌린 씨앗이 돌아오는 확률도 덩달아 줄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공론화는 됐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야. 여전히 제주도내에서 씨앗이 자체적으로 조달이 안 되고 있어. 내가 10년 째 씨앗을 나눠주고 있는데, 이게 2차 기부, 3차 기부로 안 이어지는 걸 보면, 전업농의 토종 종자 확보와 재배가 필요한 것 같아... 근데 소비자가 아직 적으니 누가 기르겠어? 그래서 이제부턴 재래종의 효과나 씨앗 보존을 위한 교육이나 강연을 돌아다니려고"

김씨의 이러한 의지에 따라, 도서관의 모임이나 행사의 방향도 씨앗 기부 뿐 만이 아니라, 토종 씨앗이나 유기농 순환 농법 교육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 날 제주씨앗도서관 모임도 점심 만찬을 끝낸 뒤 다 같이 제주씨앗도서관 소유의 ‘유기농 재래 밀감 과수원’으로 이동해 교육을 시작했다.
 

"50년 전 감귤 1개 영양이 지금 감귤의 30개 영양입니다."

▲유기농 감귤 따기 체험에서 한 가족 회원들이 귤을 따고 있다.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농약과 비료를 전혀 주지 않은 과수원이라는 설명과 함께, 유기농 감귤 따기 체험이 이뤄졌다. 김 씨는 계속해서 과수원을 돌아다니며 회원들에게 설명을 해줬다. "지금 여러분이 따는 귤은 땅에 어떤 비료나 농약도 뿌리지 않은 채 자란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50년 전에 귤보다 영양가가 훨씬 모자라요. 땅에 하도 사람들이 이것, 저것 많이 재배하다 보니 이 사단이 난거야." 점심만찬에서 보이던 부드러운 모습에서 벗어나 다소 격양된 말투의 김씨의 교육이 이어졌다. "그런데 거기에다 많이 생산하기 위해 개량된 종자를 심었어요. 비록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토양에 맞지도 않는 식물이 과연 제대로 영양을 흡수할까요? 그래서 다시 사람들이 재래종을 찾기 시작하는 거에요"

정신없이 귤을 따고 있다가도 김씨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가 먹는 작물들이 막상 속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원들이 각자 한봉지씩 귤을 딸 때까지 김씨의 교육은 계속 이어졌다.
 

"심어보고, 먹어보고, 나누어 주세요"

▲김 씨의 손에 제주 보리콩 종자가 올려져있다. 이 날 보리콩 종자 40여개가 회원들에게 나눠졌다.


두둑히 담긴 귤 봉지를 내려놓고 회원들이 모두 모닥불 근처로 모여들었다. 김씨의 말이 이어졌다. "당장의 생산에 급급해 농기업에서 생산해낸 보급형 씨앗을 쓰면 당장은 편할 거에요. 하지만 정작 시간이 흐르고, 토종 종자도 다 사라져 버렸을 때, 그들이 종자를 차단 한다면요? 당장의 편의를 위해서 앞으로를 내다보지 못하면 안돼요. 적어도 식량에서 있어서만큼은 주권을 갖고 있어야지요. 그래서 제가 이 씨앗들을 계속 찾으러 다니는 겁니다."

김씨의 말이 끝난 뒤, 그 날의 대미를 장식할 씨앗이 등장했다. 오늘 씨앗도서관의 기부 종자는 ‘제주 보리콩’이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완두콩의 개량 전 종자로 학명도 갖고 있지 않는 재래 콩이다. 보리를 심을 때 같이 심는 콩이어서 보리콩이라 부른다는데, 모임이 열릴 때 즈음이 파종시기여서 선정하게 됐다고 한다. "가서 심어보고, 먹어보고, 주변에 나누어주세요! 좋은건 나눠야죠" 김 씨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있었다.

보리콩 씨앗 기부로 정식 행사가 끝이 났다. 모인 회원들의 토종 종자 농사 경험 토크쇼로 자연스레 진행됐지만, 나는 먼저 발걸음을 뗐다. 인사를 하고 가려는 나를 김 씨가 바래다주었다. "현재 우리 씨앗 도서관이 갖고 있는 종자가 500종류에요. 이번 가을이 끝날 때 쯤, 다시 여행을 떠나려고 해요. 새로운 종자들을 찾아야죠. 늦가을은 종자가 많은 계절이거든요."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자 김 씨는 "1000여종의 씨앗을 모으고 싶어요. 정말 제주도의 토종종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곡물 종자나 필수 작물들의 종자는 꼭 모아보고 싶네요. 농촌에 계신 어르신들이 갖고 있던 종자들이 영원히 잠들기 전에, 내가 가서 잠을 깨워야겠지" 김 씨는 책임감을 느낀다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보리콩 종자 봉투를 쥐어주었다. "기자도 이제 씨앗 지킴이야. 책임감을 가져 보라구" 그는 내게 비장하게 말하고는 가버렸다. 돌아오는 길 내내 주머니 속에 담긴 책임감이 무거웠다. <2015 신문제작실습 / 윤지혁>

 

"제주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김윤수 대표가 2부 행사에서 토종 씨앗 재배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제주의 가치는 땅이죠"

“제주도에 사람이 많이 오다보니 파괴가 되고 있어요. 그걸 멈춰야 하고 치유해야 하는 게 흙을 다루는 사람들의 숙명인 것 같아요. 저는 제주도의 그런 가치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요. 흙만이 자연을 보전시킬 수 있고 살릴 수 있어요. 사람들은 파괴적으로 개발 할 수밖에 없는 성향을 갖고 있고, 우리는 흙이라는 것을 지키며 그걸 회복시키고 있는 거죠. 제주도가 현재 갖고 있고,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가치는 흙이라고 생각해요”

키워드

#N
저작권자 © 제주대언론홍보학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