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06월 한열회복기원 시위 <(사)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는데 제주에서는 뭐 하고 있느냐“

1987년 6월 10일 제주대학교에서는 총학생회 주최로 시국 대토론회가 열리고 한차례 교문 앞에서 투석전을 벌인다. 당시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경찰에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끓어오르던 시위의 열기에 비해 제주지역은 열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당시 시위를 주도할만한 사회 운동 단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학생들이 시국을 걱정하면서도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 학생운동의 새 흐름

그러던 중 학생 운동권 진영은 물론이고, 일반 학생들, 특히 1,2학년 중심으로 “거리로 나가 싸우자"라는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송형관 총학생회장과 학생지도부 대표들은 수많은 논의 끝에 거리 위 시위를 선택하고 모든 역량을 거리로 모으자는데 합의했다.

▲1987년 총학생회장 송형관과 여학생회장 송영란 인터뷰 <제주대신문 87년 3월 10일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구나. 잘못된 권력에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몸으로 실천하느냐, 중간 입장에 있느냐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뿐 그시대에 정신은 다들 비슷하게 느꼈을 거예요.”

제주 경찰병력 상당수가 서울과 부산 등 시위가 많은 대도시로 파견됐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제주 시내 한복판으로 모든 인원을 모으자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반은 학교에서 반은 제주시 중앙로에 모여 있다가 동시에 시위를 하는 작전이다.

6월 21일 제주대학교에서는 서클연합회 회장 주도로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비상학생총회를 갖는다. 학생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게 기말고사를 보지 말자고 결의한 뒤 곧바로 교문 밖으로 나서기를 시도했다. 제주대 입구 외솔 나무 앞에서 경찰을 마주한 시위대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한다. (제주대신문, 87년 7월 10일 자)

동시에 송형관 총학생회장은 여학생회장과 인문대, 사회과학대 회장 등 학생 지도부 대표와 10여 명의 별동대원을 이끌고 대학 뒷산을 넘어 지금의 국제대 부근에서 버스를 타고 서귀포시로 이동했다.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100도로를 오가는 버스를 갈아탄 뒤 제주 시내 동문시장으로 이동했다. 경찰을 속이기 위한 양동 작전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날 송 씨와 대원들은 동문시장을 거쳐 중앙로 현대약국 옆에 작은 골목에 몸을 숨겼다. 중앙로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내려오는 학생들을 기다렸다.

오후 2시 10분. 키도 크고 덩치가 있는 송형관 총학생회장이 “독재 정권 타도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시위대가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진압경찰이 늦게 출동하자 중앙로 현대약국 앞 차도를 점거하고 자리에 앉아 농성에 들어갔다.

“군부정권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총학생회장으로서 선두에 선다는 건 언제든지 경찰에 잡혀가서 구속될 수 있다는 각오 없이는 할 수가 없었어요. 잡히더라도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의 열망도 워낙 강했기 때문에 시위대를 이끌고 거리에 나설 때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어요.”

# 6월 민주 항쟁의 시작 – 뜨거운 함성

뒤늦게 경찰이 출동했지만 늘어난 시위대에 압도당하며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초 예상했던 대로 시위 진압을 전문으로 하는 전투경찰은 없는 듯 보였다. “50명 정도로 보였는데, 배가 나온 40대 전후의 일반 경찰의 모습이었어요. 전경의 육지부 차출이 확실해 보였어요. 양동 작전의 대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습니다”

▲1987년 6월 21일 중앙로에서 최초로 가두시위 성사 <출처: 제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후 3시 시위대는 중앙 로터리로 나아갔다. 도로 위 자유를 향하는 발자국이 늘어났다.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이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고 그러던 중 제주대 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시위대도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위대의 함성이 환호성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뚫고 내려오는 과정도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몰랐다.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준 순간 대중들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저지선을 뚫지 못하더라도 해산하고 귀가하는 학생들이 이쪽으로 참여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소식을 듣기 전까지 많이 기다렸어요. 대열 합류의 극적 효과는 대단했어요.”

오후 4시 50분. 마침내 중앙로 시위대와 대학 시위대가 남문 로터리에서 합류했다. 10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대는 제주 시내 한복판에 모이면서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일대 도로가 시위대로 가득 차면서 교통이 마비됐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손뼉을 치고 치고 음료수를 건네는 시민들이었다. (제주대신문, 87년 7월 10일 자)

시위대는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민정당사가 있는 제주 시청 앞까지 거리행진을 하고 나서 자진 해산했다. 

6월 23일. 시민들과 집회를 약속한 날, 출정식을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갔는데 경찰 저지선에 막혔다. 시위 진압훈련을 받은 전경대원들이 가로막았다. 육지에서 복귀한 전경들이 시위대를 가로 막아섰다.

“난감했어요. 오후 6시 중앙로에서 시민들과 집회 약속을 한 상황이라 애가 탔습니다.” 

급하게 30명으로 별동대를 꾸렸다. 아라동과 영평동으로 이어지는 밭을 가로질러 동문시장으로 진입했다. 이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중앙로 시위를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나타난 경찰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터트리며 시위대를 덮쳤다. 시위 현장이 삽시간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체포조로 보이는 전경대원 대여섯 명이 달려들었다. 땅바닥에 처박혔다. 눈앞에 보이는 가로등 기둥을 붙잡고 늘어졌다. “독재정권 타도하자, 폭력경찰 물러가라” 있는 힘을 다해 한참 고함을 질렀다. “어느 순간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걸 느꼈어요. 완전히 탈진했던 거죠.” 경찰들은 번쩍 들고 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6월 24일 새벽. 경찰에 연행되고 나서 조사를 받고 대기하고 있다가 풀려났다. 지치고 힘이 들었다. 그래도 뒤에는 항상 아버지가 있었다. 그 당시 경찰과 안기부(지금의 국정원)는 학생 운동의 핵심 멤버의 부모를 설득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저 역시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더 해라, 더 크게 나아가라고 하셨죠.” 이후에 정부가 항복하는 상황이 다가오니까, 물러서고 할 것 없이 더 밀어붙였다.

# 시대를 잇는 언론인

1988년. 총학생회 활동이 끝나고,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다. 운동을 계속해야 할지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도 언론사 기자가 되면 내가 생각하고 꿈꿔왔던 세상을 실현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공부를 했다. 시위하느라 공부는 거의 못했지만 민주화도 어느 정도 진행되고 사회 분위기도 좋아지면서 신생 언론사들이 엄청나게 생겼다. 그렇게 기자가 되었다.

▲현재는 자영업을 운영 하고 있는 송형관씨

“기자 생활을 오래 해서 메모지를 항상 들고 다녀”

2016년. 보도제작국장을 마치며 25년의 기자 생활을 뒤로하고 은퇴했다. 현재 자영업을 운영하는 그의 손곁엔 항상 메모지가 있다. 그는 언론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한다.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소신을 가져야 한다고.

1987년 6월 제주대 학생의 민주운동은 순수한 열정으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미력이나마 사회 변혁에 일조했다. 이 6월 항쟁은 학생에 의해서 주도되어 전 도민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의 노력은 학외 민주 운동으로 확대시켰고, 특히 시위 과정에서 학외 사회 운동 단체 및 학내외를 아우르는 연합운동 단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사회 각 분야별로 운동 단체 출범의 도화선이 됐다.<2020 신문제작실습 / 임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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