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강한 햇살이 내리쬐던 무더운 날씨와 다르게 당일에는 흐린 구름이 우중충한 기분을 대신 말해주었다. 마치 그날의 슬픔을 표현하는 듯했다. 이어 중국발 감염체의 위협에 방문객 출입을 막은 4·3평화공원의 공허함이 그 쓸쓸함을 더했다.

많은 생각이 스쳐 가는 통에 선뜻 입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무거운 주제의 취재를 택한 책임감, 며칠 밤 사료를 뒤지며 공부했으나 짧은 식견을 금방 들킬 것만 같은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방에 장식한 동백꽃 배지를 손에 움켜쥐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기다림’, 그날의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기를 희망하는 기다림의 감정을 서로에게 공감토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힘껏 문을 열고 들어간 기념관에는 젊은 노신사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 주었다. 밖에서 온갖 걱정을 했던 내 모습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다정한 웃음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해설사실을 안내했으며, 테이블에 마주한 둘은 서로의 점심이 온전했는지를 물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코로나 여파로 인해 휴관 중인 4·3평화공원의 쓸쓸한 모습

# 내 주변과 도민들에게, 나아가 국민들에게 바로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올해 나이 68세의 김성용 씨는 33명의 제주4·3문화해설사협회에 회장직을 맡고 있다. 4·3문화해설사란 제주 4·3의 역사적 진실을 통한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전달하기 위해, 4·3유적지를 방문객들과 동행하면서 설명과 안내를 담당하는 직업이다. 4·3의 정확한 정의가 없었던 시절의 시대적 흐름이 해설사를 요구했고,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그는 해설사를 하게 된 계기를 돌아보며 해설사의 역할을 설명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4·3에 폭동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울리는 이름을 찾기 위한 공부를 더 하다가 사람들에게 역사를 바로 알려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최근 들어 각종 미디어의 발달로 4·3을 올바르게 보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민간인 학살 부분만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 같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학살 부분만이 아닌 4·3의 발발 원인과 과정 등의 내용도 무척 중요하고, 이 방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 해설사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 4·3을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애착이 생깁니다.

“해설사에게 가장 필요한 적성은 당연히 4·3을 아끼는 마음이겠죠?”

나의 질문에 해설사는 웃으며 예상치 못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 답변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해설사들이 4·3에 강한 애정을 갖고 이를 알리는 데 진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없어도 4·3을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애착이 생깁니다. 4·3문화해설사 중에는 아직도 해설을 하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4·3이라는 슬픈 역사에 동감을 하고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겠죠. 해설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고자 하는 자세와 인성은 물론이거니와 소통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4·3을 이야기하다 보면 앞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소통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아직도 4·3을 폭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해설 중 ‘좌파 프락치’라며 폭언을 쏟아붓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이 사람들을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 않고, 역사적 진실만을 이야기하여 그들 스스로가 판단하게 만든다고 했다. 여기서 역사적 진실이란 제주 도민 4만 명이 토벌대와 무장대에게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화자는 처음에는 힘들어하지만 서서히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희생의 책임이 누구인가를 떠나, 무고한 제주 도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슬픈 사건이라는 것을 말이다.

# 4·3 문화해설사라는 직업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4·3 문화해설사라는 직업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4·3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긍심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4·3 문화해설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서울에 위치한 대안학교 학생들과 1박 2일 동안 유적지 기행을 다녔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친구들이 진정성 있게 4·3을 공감해 주고, 자기 일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여줘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대안학교 학생들은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김 씨에게 감사의 편지와 선물을 보내와서, 이에 김 씨도 답례를 했다고 밝혔다.

중학교를 다니는 학생 중 김 씨에게 4·3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싶다며 연락 온 친구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었다. 김 씨는 그 친구에게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라고 답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전에 4·3과 관련한 작품을 출품했다고 했다. 그 친구의 열정은 학업과 취업 활동에만 열중하고 있는 우리네 대학생들에게 묵직한 메시지 하나를 던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메시지에 회신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다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화로는 작년부터 사관학교생과 의무경찰들이 4·3을 추모하고자 기념관을 찾아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4·3의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단체에서 잘못된 역사적 행동에 사과를 하고, 참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가 참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김 씨는 많은 이들과 함께 4·3을 알리려고 노력한 결과, 조금씩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아마 이러한 변화들이 김 씨의 노력에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코로나가 종식되면 여러분과 함께 유적지를 걷고 싶습니다.

김 씨는 코로나 여파로 인한 4·3평화공원의 휴관을 그 누구보다 아쉬워했다.

“작년 같으면 이맘때쯤에 한참 해설하고 돌아다니고 있을 땐데 안타깝습니다. 4·3 70주년을 맞이했던 재작년에 방문객이 40만 명, 작년에는 43만 명의 방문객이 기념관을 찾아주었습니다. 올해가 방문객을 굳히는 해인데 국가적 재난 앞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김 씨는 탄식을 하며, 바이러스가 종식될 동안 기획할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김 씨는 사실 4·3문화해설사만이 아닌 사회․인문해설사, 기후변화강사, 세계자연유산 해설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김 씨는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4·3을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것이 4·3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된 계기로 삼아, 4·3 외 강연에서도 짤막하게 4·3을 언급하거나 연관 지어 설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씨는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선 학생들이 4·3 관련 도서를 많이 접해 바른 견해를 가졌으면 합니다. 또한 4·3은 유적지를 실제로 보고 확인하는게 중요합니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유적지와 기념관을 함께 거닐면서 몸소 4·3을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김 씨는 4·3을 배우고자 하는 나의 자세를 좋게 봐주었고, 나는 4·3을 사랑하고 널리 알리려는 김 씨의 태도에 존경심을 갖게 됐다. 아마도 그날의 역사적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길 희망하는 ‘기다림’의 감정을 서로에게 공감하게 된 순간이었던 것 같다. <2020 신문제작실습 / 김명근> 

김성용 해설사와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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