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95년생이나 다를 게 없네. 한 친구가 읽고는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친구는 읽어보기도 전에 대충 이야기만 듣고도 질색했다. 난 그거 안 읽을래. 사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별로 끌리지도 눈을 사로잡지도 않았다. 제목부터 디자인까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 제목은 지겨울 만큼 꽤 오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사실 가족독서릴레이가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나는 마땅히 읽을 책을 청해놓지 않아 어떤 것으로 할까 찾고 있었고, 도서관에 간 어느 날 이 책을 읽고 있는 친구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책 재밌어? 하는 질문에, 너도 읽어보라는 친구의 말에 그만 덜컥 빌려버렸다. 무슨 내용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고, 한 번 책을 펼쳐든 나는 마지막 장을 놓을 때까지 쉽게 멈출 수 없었다. 김지영 씨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이 이후의 일이 궁금해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서.

  다 읽고 나서 작가의 말을 열어봤다. 이게 소설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이리도 현실 같은데. 김지영 씨가 나일 수도 있고 친구, 언니, 엄마, 혹은 주변의 누군가일 수도 있다는 말이. ‘운 좋게’살아남았다는 말이 살갗에 와 닿았다.

  짧게 입지 마, 일찍 일찍 다녀, 입은 가리고 웃어, 과일은 깎을 줄 알아야지. 이 모든 말 앞에는 여자가, 라는 말이 붙었다. 여자가. 어릴 때부터 그 말이 어떤 의미의 말인지도 모르면서 싫었다. 왜 오빠는 어디서 자고 온다고 하면 대뜸 허락해주면서 나는 며칠 동안 사정사정을 해도 안 되는지. 똑같이 교복을 입는데도 빨래하는 건 왜 엄마나 나인지. 같이 일하고 들어왔으면서 밥 하는 건 왜 항상 엄마인지. 언제부터 그런 말을 들었는지조차 기억 안 나는 말들. 왜 그래야 하는데요, 하는 내 질문에 돌아오는 건 모두 납득이 가지 않는 답뿐이었다.

  내가 몇 시에 밝은 곳을 다니든 어두운 곳을 다니든, 짧은 옷을 입든 파인 옷을 입든 그게 내가 어떤 일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는 것도 아닌데도. 그런대도 그때는 다들 그런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마치 피해자가 잘못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자꾸만 곱씹곤 했다.

  며칠 전에는 다른 사람이 내가 과제를 하기 위해 이 책을 들고 다니는 걸 보고 읽어보고 싶다 해서 손에 들려줬다. 읽고 나서 감상을 물어보기에 반문했더니 그냥 여러 가지를 느꼈단다. 더 캐물으니 심하게 표현한 것 같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웃기게도 이 책을 읽었던 다른 내 성별이 여자인 친구 중 아무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다. 이 책이 너무 현실 같았기 때문에.

  내 다음 순서로 책을 든 친구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친구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어째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냐고. 같이 책 내용에 대해 토로하다 화를 냈다. 아내가 왜 그렇게 됐는지도 아는 김지영 씨의 남편도 결국 달라지는 바 없이 끝맺음을 맺어서. 화가 나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오랜 연인과의 말씨름 끝에 서로 안녕을 고했다. 택배 이야기가 나와서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여자만 사는 집에서 여성 용품만 자꾸 사면 (불특정 남성인)택배기사가 여자끼리 산다는걸 알 테니 조심해야 돼. 위험할 수도 있어.” 라고 말한 순간 그 친구는 내게 그저 “다른 사람을 그딴 식으로 매도하지 마.” 라고 했다. 내가 밤길을 다니며 뒤의 발소리에 얼마나 심장을 졸이는지, 무서워하는지도 알고 있던 사람이. 하다못해 그동안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에 엄청 충격을 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대고 ‘저 사람이 날 죽일지도 몰라!’, 라거나 ‘모든 사람은 쓰레기야’와 같은 말이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무해한 사람을 싸잡아서 욕하지 말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 이해하면서 말하는 거라던 말이 전혀 무색하게, 온전히 자신의 입장에서밖에 이야기 하지 않던 모습이 조금은 씁쓸하게 남았지만. 하다못해 -이런 주제에 관련된-책이라도 한 권 읽고 다시 말해보자는 말도 재차 무시한 채 그렇게 결별을 선언하고 헤어졌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82년생 김지영 씨. 어쩌면 친구나 나도 또 다른 82년생 김지영 씨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라고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분명 겪은 일들이 있고, 앞으로도 높은 확률로 겪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여전히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이렇게 목소리를 남기고자 한다.
<2017 출판문화론 / 언론홍보학과 4학년 김시언>

김시언 siun3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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