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인간이 있었네. 그저 나약했던 한 남자.
저 하늘을 동경해 스스로 신이 되려 했지.
자신을 닮은 생명을 만들었어.
하지만 깨달았어. 준비가 안 된거야.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행복할까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죽을건가
신이 되고 싶었지만 무책임한 욕심일 뿐
인간은 왜 이 세상이 자기 꺼라 믿는 걸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中 괴물넘버 <상처>


프랑켄슈타인 자체는 모두가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실상 그를 만든 박사의 이름이지만 정작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을 박사의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연히 접한 뮤지컬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평생을 괴물의 이름으로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이름조차 없는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뮤지컬이란 장르를 처음 접한 것은 2016년 2월 24일. 우연히 유튜브 영상으로 접한 프랑켄슈타인의 프레스콜 중 ‘난 괴물’이라는 넘버가 시작이였다. 꾀죄죄한 모습을 한 배우가 바닥을 기며 처절한 목소리로 자신이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왜 괴물이라 불리는지 허공의 누군가에게 또는 관객들이 있을 무대 앞을 바라보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처절히 울던 배우는, 아니 괴물은 후반부에 악이 찬 목소리로 복수를 다짐하더니 자신을 껴안으며 애초로운 목소리로 이루어지지 못한 꿈을 이야기한다. 그 짧은 영상에 흠뻑 빠진 나는 곧바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검색했고 여러 날을 프레스콜 영상과 후기를 찾아 헤매다 결국 티켓을 끊고 직접 뮤지컬을 보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후에 마지막 공연이 이루어진 3월. 2번째 관람을 한 것은 이미 스토리에 매료되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아닐까.

  공연이 끝나고도 몇 달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뮤지컬에서 헤어나오질 못했었다. 원작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시기상 도서관에 들릴 일이 없다보니 잊고 살았다 이번 과제를 하기 위해 들렸던 도서관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같은 소재 다른 장르. 얼마나 같고 다를지 다시 공연 전날 밤의 흥분과 비슷한 감정이 흘렀다. 내가 기억하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야기와 꽤나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어 비교는 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결말을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면서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로 이해하기로 했다. 닮았으면서 닮지 않은 주인공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부추긴 셈이다.

  악은 태어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소설에서 우리에게 물어보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여기서 악은 괴물을 뜻한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박사인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박사의 시점이 아닌 괴물의 시점에서는 자신을 만들고 자신을 부정한 그가 악이였을테니.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저 질문에 대한 답은 후자라 내릴 수 있다. 괴물이 이 이야기 속 악이라 할 때, 괴물은 태어났을 땐 분명 순수한 ‘무’의 상태였다. 그런 괴물이 박사의 주변 인물을 죽여나간 이유가 태생이 악이여서이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한 답은 책보단 뮤지컬의 한 대사를 통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난 불행하기에 악하다. 악하기에 복수를 원해’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中 괴물의 대사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악하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괴물은 자신이 악하기에 복수를 했다 말하며, 악한 이유를 불행에서 찾았다. 괴물인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불행을 인식한 것은 아니였다. 뮤지컬 속, 소설 속 모두 창조주였던 박사에게 부정당하며 혼란을 겪게 되는데 소설 속 괴물은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보며 인간의 언어과 감정을 배운다. 인간의 모습을 본 뜬, 인간이었어야 할 존재인 괴물은 배움으로서 오히려 자신의 불행을 인식한다. “나에 대해 알수록 슬픔은 더해만 갔습니다.” 괴물이 박사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한 말 중 일부이다. 세상에 혼자라는 감정. 그 감정마저 배워버린 괴물은 사회에서 격리되어버린 외톨이가 되었다. 그는 박사에게 말한다. “모두가 불쌍한 날 미워하는군요. 세상 무엇보다 비참한 내가, 왜 이렇게 미움을 받아야 합니까. 나를 만든 당신조차 당신의 피조물인 날 경멸하고 미워하는군요.”

  그러한 괴물의 모습에 관찰자이자 같은 인간인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작가는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뮤지컬 속 괴물과 달리 소설 속 괴물은 박사에게 기회를 분명히 주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으니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달라. 외롭지 않게. 소설 속 괴물은 창조주인 박사는 이미 중요치 않았다. 그저 자신이 배운 외로움을 해결하는 것. 자신이 봤던 따뜻한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을 원했다. 아마 박사가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비극은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다시금 그 대목을 읽어도 아쉬웠다. 서로가 끝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는 갈림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과 뮤지컬 속 괴물의 불행의 시점과 이유는 조금씩 다른 색을 띄었지만 인간에 의해 불행을 인지하고 배신을 당함으로서 극도의 불행을 느끼고 악이라는 것을 행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박사가 아닌 괴물에 대한 동정심이 더욱 갔던 것은 사실 인간인 내가 박사를 대신해 죄책감을 느낀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괴물에 나 자신을 이입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타인들에 의해 사회 속 소외되어 있는 괴물의 모습과 자의적으로 소외시키고 있을지 모르는 내 자신의 모습을 인지했기에 더욱 이끌려 괴물에 제 자신을 집어넣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만든 틀 속 그것이 맞다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배척하는 모습이 극적으로 들어난 소설이기에 더 그랬다. 내가 머물고 있는 사회에서 나는 조금씩 궤도를 벗어나지만 애써 궤도에 들려 노력한다. 괴물 또한 그랬다. 박사에게 이입하는 사람일지라도 괴물 스스로는 굉장히 노력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 속 괴물은 끝내 이름 하나 남기지(가지지) 못하고 스스로 떠난다. 인간이 없는 곳. 그 곳을 찾아. 외로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지. 그와 달리 뮤지컬 속 괴물은 창조주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뮤지컬 속 괴물의 경우 머리가 박사의 친우인 앙리의 머리였으며 둘 밖에 없는 북극이라는 장소에서 박사 혼자 남김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외로움을 남김으로서 복수를 완성했다. 그것이 창조주에게 할 수 있는 자신의 최고의 복수였으니 말이다. 둘과 달리 완전한 인간이지만 현실 속 괴물인 나는 어떤 결말을 맺을까. 아마 숨죽인 채 정상이라, 다른 사람들이 옳다 말하는 그것의 궤도를 찾아 벗어나지 않으려 발버둥치지 않을까싶다.

  각각의 다른 결말을 맞이한, 맞이할 괴물들 중 가장 승리자는 사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각자 남긴 것은 있었다. 소설 속 괴물은 외면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인간에 가까웠다. 뮤지컬 속 괴물은 복수를 이루었다. 현실 속 나는 이름을 가졌다. 어딘가 있을 또 다른 결말을 맞이한 괴물은 어떤 것을 남겼을까. 모든 것을 가진 괴물이 있을까. 모든 것을 다 가졌을 때 괴물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답을 찾기 위한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는 중이다.

한 괴물이 있었네
그저 상처 속에 살던
저 세상 끝 그곳엔 행복, 그런게 있을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中 괴물넘버 <상처>

<2017 출판문화론 / 언론홍보학과 4학년 고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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