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대자보 사건

1987년 4월 3일, 그동안의 침묵을 깨는 4.3 대자보가 학내 벽보판에 붙여졌다. 이 대자보는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4.3 진상규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운동의 시작을 알렸고, 훗날 대규모 6월 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4.19 혁명 이후 4.3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강요된 침묵만이 존재하던 때 학생이 직접 작성한 대자보를 통해 목소리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다.

문제는 13일이 지난 4월 15일 발생했다. 경찰은 새벽 5시 반, 오전 10시경에 대자보를 붙인 여학생회장과 사회과학대학 홍보부장을 연행하고 총학생회장과 사회과학대학 회장에게 지명수배를 내렸다. (제주대신문, 87년 5월13일자)

대자보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4.3사건을 공론화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긴 대자보는 경찰에게 눈엣가시 일 수밖에 없었다.

연행된 사실을 접한 학생들은 이 사건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학생 활동의 탄압을 목소리 높여 규탄하며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됐다. 제주대 신문 87년 5월 13일자에 따르면, 학생들은 올해의 학생 활동을 경색케 하려는 학원 탄압의 측면으로 파악했던 게 이번 사태의 주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며 언급했다.

당일 오후 5시경 학생 30여 명은 4.3 대자보 관련학생들의 연행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학과 유리창 등 기물을 파손했다. 학생들은 다음날 오후 1시 학생회관 앞에서 총학생회 주체로 학생 2백여명이 모여 ‘4.19 민주혁명계승대회’라는 이름 하에 ‘연행학생석방’과 ‘부당징계철회’, ‘학원 자율 쟁취’를 주장하며 농성하기에 이른다.

학생들이 여학생회장과 사회과학대학 홍보부장을 경찰이 연행해 간 것에 항의하며 항의농성을 하고 있다. <출처: 제주대신문 87년 5월 13일자>

그러나 학생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김두희 제주대학교 총장은 “도경국장에게 연행 학생 석방 협조를 요청해 놓았고, 지난해 부당 징계 문제는 해결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공식적인 언약만 했을 뿐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학생들은 그날 저녁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중간고사 거부안을 제시했다. (제주대신문, 87년 5월 13일자)

 

#학생 90% 중간고사 거부

4월 17일, 오후 1시 학생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 1 차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에서 20일부터 진행되는 중간고사 거부안이 결의되고, 비상대책 위원회가 구성됐다. (제주대신문, 87년 5월 13일자)

당일 오후 9시경 여학생회장과 사회과학대학 홍보부장이 석방됐다. 제 1차 비상학생총회가 열리고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규모 시위 조짐을 보이자 경찰 측이 빠르게 대처한 것이다. 제주대신문 87년 5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두 학생이 풀려나게 된 주된 이유는 16일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가 주효했다고 언급하며 또한 경찰 측에서 4.3 대자보 사건이 야기할지 모를 학내 사태 심각성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내사종결 시킨 사실도 있음을 밝혔다.

두 명의 학생이 석방되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학생회는 다음날 있을 제 2차 비상학생총회에 학생들의 참여가 이뤄질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존재했다.

제주대신문 87년 5월 13일 기사

다음날 4월18일 오후 2시경 제 2차 비상학생총회에 학생 1천 명이 참석했다. 학생회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학원자율화투쟁’에 대한 경과보고대회를 진행하고 ‘지명수배 철회’ 와 ‘학원 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농성을 이어갔다.

학생들이 석방되면서 해결될 것으로 예상했던 학교당국의 생각과 달리 학생들의 농성이 이어지자 다음날 전체 교수 회의를 열고 중간고사를 강행할 것을 결의했다. (제주대신문, 87년 5월 13일자)

4월 20일 중간고사는 강행됐다. 그러나 1주일의 시험기간 동안 전체 학생의 10%밖에 응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원자율화투쟁에 합류한 것이다. 제주대 신문 87년 5월13일자 기사는 중간고사 거부 결정 이후 20일의 집회와 교내 시위 참가 학생이 3천여 명 선이었고 초기에 시험거부 동참학생수가 90%선을 상회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며 언급했다.

계속해서 시험거부투쟁 1,2,3,4차 경과보고 대회로 시위를 이어나갔고 4월 23일 학생 140여 명이 총장실을 점거하여 철야 농성에 돌입하기 이른다. 이에 학교 측은 24일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여 타협안을 논의하였고 4월25일 오전 11시 40분경 총장실 점거 및 철야농성을 풀고 해산했다. (제주대신문, 87년 5월 13일자)

길었던 열흘간의 투쟁으로 ‘4.3 대자보 사건’은 일단락 됐다.

 

#6월 민주항쟁의 촉발제 - 87년 그 뜨거웠던 한해

이처럼 ‘4.3대자보 사건’은 마무리 되었으나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서 보여진 대규모 시위는 같은 해에 ‘6월 민주항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국가의 권력 아래 숨죽이고 있던 목소리가 고개를 들면서 학생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이것이 발단이되 학생들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슴속에 새기게 됐다.

특히 제주대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의 젊음에 대한 기록에 4.3이라는 글자를 새기면서 그동안 잠들어있던 4.3의 목소리를 일깨웠다. 4.3대자보 사건이라는 이 파동은 멈추지 않고 88년, 89년 점점 더 커다란 파동으로 퍼져나갔다.<2017 신문제작실습 / 오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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