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비공론화시기, 1시기, 2시기를 넘어 3시기인 1990년도부터 1992년도까지 이전 시기보다 격렬하고 본격화된 대학가 4.3진상규명운동이 진행됐다.

90년에는 대학가 4.3진상규명운동이 이전 시기에 비해 격렬해졌다.

90년 4월 10일 자 제주대신문에는 ‘4.3진상 규명과 민자당 분쇄를 위한 청년 학도 결의대회’에 대한 기사가 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결의대회에서 추모제와 자유 성토가 끝난 후 8백여 명의 학생들은 관덕정까지의 걷기대회를 위해 교문 앞으로 진출했고 교수아파트 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 4명이 연행되고 학생 10여명이 다쳤으며, 경찰 승용차 3대가 전소됐다.

90년도 제주대신문의 1면을 가장 많은 차지한 기사는 민자당 분쇄 투쟁에 대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4.3진상 규명과 민자당 분쇄를 위한 청년 학도 결의대회’가 투쟁에 불씨를 지폈으며 90년에 민자당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것을 알 수 있다.

91년에는 4월 1일부터 일주일간 사월제가 진행됐다. 다른 연도의 사월제와 달리 재야단체와 시민단체 등 여러 단체 공동 주관 하 개최되며 대학가 4.3진상규명운동이 본격화됨을 알 수 있다. 91년 열린 진상규명운동은 그 어느 해보다 격렬했다.

91년 4월 2일 자 제주대신문에는 제주대학교 내외 각지에서 ‘사월제’가 열렸다는 기사가 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제주대학교 위성곤 총학생회장은 “이제까지의 4.3제가 단순히 추모제 행사만으로 치러져 학우들의 소극적 참여와 일회적 행사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또한 “‘4.3항쟁 계승 주간’으로 일주일을 잡아 4.3에 대한 인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제주지역 민주단체의 연대 강화 및 학우들의 단결 도모의 장으로 승화시키지 한다”고 의지를 표명하며 사월제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사월제’ 기간 중 4월 3일에는 오후 2시 30분부터 야외음악당에서 ‘4.3항쟁계승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청년 아라 궐기대회’를 가진 뒤 교문 밖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대기 중이던 진압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이들을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학생 50여 명이 연행됐다. 이날 오후 5시 관덕정에서 4.3추모집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경찰이 2천여 명의 시위진압대를 배치, 원천봉쇄를 하는 바람에 무산되자 사월제 공동준비 위원회 대표단과 학생, 시민들은 제주시 중앙성당에서 ‘4.3추모제 원천봉쇄 규탄대회’를 가졌다. 오후 6시 30분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중앙로와 광양로 일대 등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을 이날 하루 학생과 시민 2백여 명을 사전 검문검색으로 무차별 연행했다.(제주대신문 91년 4월 2일 자)

다음 날인 4일에는 ‘4.3자주 항쟁 계승과 노 정권 퇴진을 위한 투쟁대회 보고 및 규탄대회’가 학생 8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규탄대회를 마치고 학생 8백여 명은 학교 통근버스와 시내버스를 이용 제주 경찰서 앞에 집결하여 인도를 점거한 후 “4.3진상 규명 외쳤는데 연행이 웬 말이냐”, “4.3항쟁 계승하여 조국 통일 앞당기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연행된 학생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의 완전 석방 요구에 경찰 측은 백골단과 전경 2백여 명을 투입, 최루탄을 발사하는가 하면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차별하게 때리면서 강제 해산시켰다. 이날 오후 8시 30분경부터 중앙로와 동문로 일대에서 1백50여 명의 학생들이 총학생회장 강제 연행을 규탄하는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번 4.3시위와 관련해 경찰이 제주대학교 학생들만 해도 무려 4백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을 마구잡이로 연행했다. 연행 과정에서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구타를 일삼아 부상자가 속출했고 이에 경찰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제주대신문 91년 4월 2일 자)

제주대신문 91년 4월 2일 자

91년에 진행된 사월제는 4월 3일 하루동안 진행됐던 이전 시기와 다르게 일주일간 개최됨에 따라 규모가 커지고 투쟁이 격렬해졌다. 이를 통해 시위의 규모가 커지고 참여인원도 증가하였으며 경찰의 대응도 더 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경찰의 진압이 강해진 이유는 90년 10월 13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10ㆍ13 특별선언'에 있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후 운동권 탄압이 가속화됐고 경찰의 과잉진압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월제 뿐만 아니라 ‘명지대생 강경대 학우 타살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와 ‘제주도 개발 특별법’을 반대하는 시위에서도 경찰의 과잉진압과 폭력행위로 많은 사회적 문제가 일어났다.

92년에는 90년, 91년에 비해 대학가 4.3진상규명운동이 평화롭게 진행됐다.

92년 4월 8일 자 제주대신문에는 ‘4.3제주민중항쟁 44주기 사월제 추모대회’에 대한 기사가 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오후 4시 30분부터 3시간여 동안 탑동매립지에서 시민, 학생 등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추모대회가 진행됐다. 추모대회가 끝난 후 7백여 명의 학생들은 탑동매립지에서 관덕정까지 “4.3항쟁 계승하여 민주 정부 수립하자”, “4.3의 적, 통일의 적 미국 놈들 몰아내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30~40분 정도의 평화시위를 벌인 후 정리 집회를 갖고 해산했다. 이날 오후 2시에는 총학생회 주최로 ‘민주 정부 수립, 통일조국 건설을 위한 44주기 4.3자주 항쟁 계승 대회’가 1천여 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이 계승 대회에서 총학생회는 ‘4.3자주 항쟁 계승 선언문’을 통해 “미국 반대의 죽창을 들고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연방제로 통일조국을 건설할 것”등을 결의했다.

92년 열린 ‘4.3제주민주항쟁 44주기 사월제 추모대회’에서 탑동매립지에 모인 1천여명의 시민, 학우들 (출처:제주대신문)

92년에는 이전 시기보다는 덜 격렬한 시위가 진행됐지만 90년, 91년과 다른 성격의 시위가 진행됐다. 당시 4.3사건 전후로 미국이 제주도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4.3사건이 발생한 책임이 미국에도 있다는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일어나면서 시위에는 미국을 몰아내고자 하는 반미 구호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3시기는 지금까지 대학가 4.3진상규명운동 중 가장 격렬하고 규모가 컸으며 4.3에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대학가의 투쟁이 가장 뜨겁던 시기였다. 제주대학교 학생들은 4.3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앞장서 나섰고 투쟁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해가 지날수록 커졌고 경찰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싸우고 또 싸웠다. 학생들의 끝없는 노력은 어둠속에 잠겨있던 4.3사건을 공론화의 장으로 이끌어냈다. 이들의 노력으로 대학가 4.3진상규명운동은 '제주 4ㆍ3사건 특별법'을 이끌어낸 4시기로 이어진다.

<2017신문제작실습/ 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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