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5·18 36주년이었다. 위령제든 기념일이든 그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치유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올해도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같이 부르지는 못했다. 합창은 되고 제창은 안된다는 국가보훈처의 공식입장이 그 발단이었다. 어떤 형식으로 부르든 이 노래가 광주 5·18의 정신이 담겨있는 노래임은 분명하다. 그 시작이 합창이든 제창이든 결국은 모두가 따라하게 될 노래였다. 마음이 동하면 따라하지 말라고 해도 따라하는 것이 노래이지 않은가! 그러함에도 국가와 시민사회로 대표되는 양대 세력은 그 노래 한 곡에서도 상생과 치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올해 제주 4·3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1회 '제주 4·3 평화상' 수상자 선정을 두고서. 첫 수상자는 일본 오사카 제주인들의 정착촌인 이카이노에서 태어나고 자란 올해 구순(九旬)의 작가 재일제주인 김석범이었다. 그는 1957년 일본어로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하여 4·3의 생생한 아픔을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알렸다. 또한 1976년부터 '화산도'를 쓰기 시작하여 20년 넘게 3만매 분량의 제주 4·3 이야기를 펼쳐냈다.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 하루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난 1947년 3·1절을 시작으로 한라산 입산통제가 해제되던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을 가리킨다. 그리 보면 4·3일은 고통스럽고 힘겨운, 세상에서 가장 긴 하루인 셈이다. 김석범이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한 1957년은 말할 것도 없고 '화산도'를 쓰기 시작한 1976년에도 한국과 제주에서 4·3은 그 누구도 발설해서는 안되는 숫자였고 금기어였다. 참고로 4·3이 한글로 처음 소설화된 것은 1978년에 나온 '순이삼촌'이다. 작가 현기영은 이 작품으로 고초를 당했고, 이 책은 금서목록에 올랐다. 제주 4·3은 이렇게 소설의 형식을 빌려 세상에 나왔다. 소설분야를 두어 기자가 아닌 작가에게도 저널리스트들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을 주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4·3 평화상 첫 수상은 감사를 당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한 김석범 4·3 평화상 철회하라"는 단체들의 요구로 행자부가 제주도에 감사를 요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제주도 감사위원회는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절차상 하자가 없음을 들어 "아무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에도 '4·3 평화상'이 염려되는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반쪽짜리 노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광주 5·18과 제주 4·3은 국가기념일이 되었음에도, 화해와 상생 그리고 평화와 인권의 기념제가 되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다. 반목과 갈등의 연속은 최근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역사논쟁과도 관련이 깊다. 특히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은 대부분 '종북' 문제로 귀결되곤 한다. 5·18의 '임을 위한 행진곡'과 4·3의 '평화상'도 결국은 '종북'이라는 역사논쟁에 갇히고 말았다. 거칠고 얕은 역사논쟁은 자칫 사실의 문제를 감정의 문제로 치환하여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갖게 하는 속성이 있다. 또한 이 상태에서 국가나 이념의 큰 단위로 역사를 보면 개인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국가나 정치지도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용인되고 자행되는 '역사논쟁'은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든 불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낙진 제주대학교 언론홍보학과 교수>

*본 칼럼은 한라일보 한라칼럼(2015.05.19)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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